건강이야기

프란츠 드 라 보에(프란시스퀴스) 실비우스, 1614~1672

좋은집 이야기 2021. 9. 25. 14:00

프란츠 드 라 보에(프란시스퀴스) 실비우스, Franz de le Boe(Sylvius), 1614.03.15~1672.11.19

출처: 픽사베이, Pixabay

 17세기의 의학에 주로 화학적 사고로 연구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의화학 및 의화학자라는 말이 쓰이게 됩니다. 이 학파의 대표자는 레이덴의 임상가 드 라 보에로 라틴어로 된 실비우스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실비우스는 뒤부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위그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이 일가는 북해 연안의 저지대로 옮겨 살고 있다가 전쟁이 일어나가 부모님이 독일로 피난을 갔고 실비우스는 독일 중남서부의 하나우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독일과 네덜란드의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637년에 바젤에서 의학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23세 때 하나우에서 살며 개원했고 그 도시의 시의회로부터 임명받았으나 2년도 되지 않아 자신의 학력을 높이기 위해 파리에서 네덜란드로 옮겨 레이덴에서 식물학과 해부학을 강의하며 많은 학생을 매료시킵니다. 그는 해부학자로서 특히 뛰어났으며 실제로 실비우스는 의학에서의 해부학의 기초적인 중요성을 분명하고 최종적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해부학에 대해서 저술했고 뇌의 열구에 실비우스열로 그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생리학적 연구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하비의 '심장 및 혈액의 운동'이 간행된 것은 1628년의 일로 혈액 순환 문제는 아직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실비우스는 하비의 설을 정열적으로 지지하여 이 영국인의 생각을 레이덴에서 확대하였으며 가장 깊이 의심하던 사람들까지 신용하게 만드는 실험을 하여 이를 증명했습니다.

 그래도 실비우스는아직 레이덴에서 정규 지위가 없어 박사학위자들에게 허용되는 강의를 행했을 뿐이었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개원하라는 친구의 권고를 받고 이동하여 바로 시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얻는 의사 중에 한 사람이 됩니다. 그는 또한 보수에 연연하지 않아 신교도인 벨기에 남동부 사람들인 왈론인 교회의 가난한 신자들에게 무료로 가능한 모든 일을 해줍니다. 실비우스는 17년 동안 암스테르담에서 병원을 하여 인기가 높았습니다. 1658년, 레이덴의 의학 교수 자리가 비었을 때 그는 전원일치로 교수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할 생각이었습니다. 그가 얻고 싶었던 일과 수입, 명예 , 친구들을 암스테르담에서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대학생활 즉 젊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의 가능성, 자신이 좋아하는 생각을 이야기하여 신성하고 열정적이고 젊은 마음의 반응을 살피고 확인하는 것의 가능성, 인쇄로는 불가능할 만큼 효과적으로 자신의 학설을 주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습니다. 

 병원을 운영하며 얻은 수많은 경험을 얻게 되었고 그의 견해 대부분이 독창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화학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같은 의견은 가진 동료가 적다는 사실을 알고 교수가 됩니다. 그는 강의를 하여 다시 청중을 기쁘게 하고 자신을 따르게 했습니다. 그의 평판은 각 국의 학생들이 모여들게 했습니다. 과학에는 국제어가 있어 서유럽 및 중앙 유럽에서 강의는 라틴어로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레이덴에서 시험에 합격한 학생은 어느 곳에서나 개원할 수 있었으며 학위가 있으면 어느 대학에서나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레이덴의 의학부는 알프스 북쪽에서 처음으로 임상 교육을 행했습니다. 병원을 교육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이탈리아에서 이미 실행되고 있었습니다. 16세기에 파도바에서 다 몬테(da Monte)는 학생들을 산 프란체스코 병원으로 데려가 환자의 병상 옆에서 강의를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이것을 폐지되었지만 잊혀지지는 않았으며 파도바의 학생 중 독일인 학생들이 부흥을 요구했습니다. 1578년에 같은 병원에서 보토니(Bottonoi)에 의해서 다시 도입되어 남성 환자에 대해 행해졌으며, 델리 오디(degli Oddi)에 의해서 여성 환자에 대해 강의가 행해졌습니다. 이들 두 교원이 사망하여 임상교육이 다시 중지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도바에서 연구하고 있던 네덜란드 의사들 헤우르니우스(Heurnius)와 스크레베리우스(Schrevelius)가 레이덴 대학에 이식되었습니다. 레이벤은 학부장이 됩니다.

 실비우스의 의학 시스템은 지극히 간단했으며 그 시대에 적합한 화제가 되는 개념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기계주의자라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해부학과 생리학을 특히 중시했으나 당시 해부학과 생리학은 건강과 질병의 현상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어 그는 화학과 같은 다른 영역에 대해서도 고찰했습니다. 화학은 그가 좋아하던 영역이었습니다. 발효란 하나의 물질이 다른 물질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과정, 즉 발효에 의해 선에서 분비가 영향을 받아 영양소로 섭취한 것이 혈액으로 변화합니다. 이와 같은 변화에 의한 최종 산물은 산과 알라리였습니다. 산과 알칼리의 균형이 올바로 유지되면 개체는 건강했습니다. 이에 대해 생체의 화학적 혼란에 의해서 아크리모니아(acrimoniae)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산, 혹은 알칼리라고 여겨지는데 혈액으로 들어가면 거기서 질병이 발생합니다. 치료의 목적은 '생체의 에너지를 유지하고 질병을 내쫓고 그 원인을 제거하고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산은 알칼리에 의해, 알칼리니는 산에 의해서 제거됩니다. 체액, 즉 담즙, 점액과 그 외의 것은 모두 식물성 및 광물성 기원인 구토제와 설사약에 의해서 체외로 배출되었습니다. 실비우스가 쓴 '의학이론'(1663)과 '의학 실천에 있어서의 새로운 생각'(1671)에는 매우 가치 있는 관찰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이 무렵에 본 것은 모두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실비우스는 열광적인 신봉자들을 네덜란드와 독일, 영국에도 가지고 있었는데 영국에 있는 신봉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왕립 협회 창립멤버인 토마스 윌리스(Thomas Willis, 1621~1675)입니다. 헬몬트와 실비우스는 두 사람 모두 화학적 언어로 생각했으며, 화학이 의학에 도움이 되게 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점은 헬몬트는 고독한 생애를 보내며 오해를 받았고 마지막에 처벌을 받았으나 실비우스는 유쾌한 사람으로 감사하는 환자들과 존경하는 마음을 품은 학생들에 둘러싸여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헬몬트의 작업은 생명력이 길어, 그가 논한 문제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고찰을 촉구합니다. 실비우스의 사명은 먼 과거의 기억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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