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리오 산토리오, Santorio Santorio,1561.03.29 ~ 1636.02.22

17세기 초반 갈릴레이의 영향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이 무렵에도 아직 그가 군림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갈릴레이는 새로운 귀납 과학 방법을 채용한 첫 번째 연구장 중 한 사람이었고 많은 과학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망원경은 갈릴레이에 의해 현미경으로 개조되었고, 갈릴레이는 온도계를 발명했는데 이것이 의학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고대 의사들은 인체의 온도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발열이라는 형태로 표현되는 열의 증가는 분명한 증상이었는데 의사들은 환자의 몸을 만져서 알았습니다. 갈릴레이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모든 과학 연구의 영역은 현상의 주관적인 기재에서 객관적인 측정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온도는 물리학적인 개념이 되어 수치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환자가 단순히 '고열'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환자의 질병을 아는 데 필요한 것은 의사가 열의 온도를 측정하여 미세한 진동을 기록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체온계'라고 부르는 것을 발명한 사람은 카포디스트리아의 의사 산토리오입니다. 매우 유능하고 연구에 열성적이었으며 의학의 고전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의 새로운 방법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산토리오는 1582년 파도바에서 의학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폴란드의 궁정이 파도바에 유능한 의사를 요청했을 때 산토리아가 추천되어 그가 임명되었고 1587년 폴란드로 갔고 거기서 업무가 확대되어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에서도 진찰을 부탁받게 되었습니다. 1611년 이탈리아로 돌아가 파도바에서 이론 의학(내과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1629년 교수 사임 후, 여러 대학의 초대를 받았지만 베네치아 정착하여 임상과 과학연구에 전념했습니다. 산토리오는 7권의 전문서를 저술했는데 그중 2권은 두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의학 임상에서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 종합적인 서적을 쓰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우선 스콜라철학의 방법을 따르고 있었기에 가능한 한 많은 권위자를 인용함으로 해서 자신의 발언을 강화했지만, '실험'에 의해서도 자신을 정당화했습니다. 산토리오의 명성을 높여준 저작이 1641년에 '의학 정력학 이론'으로 출판된 소책자로 30년 동안의 실험에 대한 요지를 쓴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갈레노스가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피부는 폐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는 호흡하며 휘발성 물질은 피부를 통해 몸 밖으로 나온다고 갈레노스는 보고 있었습니다. 섭취하는 양만큼 몸무게가 늘지 않는다는 이유인 것입니다. 산토리오는 이 문제에 대해서 논하고, 추론이 아닌 직접 저울을 사용하여 체중을 측정하고, 섭취한 것과 배출된 것을 측정했습니다. 그는 커다란 저울을 만들어 저울에 접시 위에 테이블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변화를 숫자로 기록하여 자신의 불감증산을 숫자로 표시합니다. 이 수치에 의해서 각종 질병의 진단과 적당한 치료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임상실험의 길로 접어들어 산토리오는 더욱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다른 생리학적 및 병리학적 현상도 정확히 측정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임상 체온계가 발명되어 불감증산을 측정하는 데 저울 다음으로 그것이 사용된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체온계는 원시적인 기구로 눈금에 새겨진 모세관의 구형으로 부풀린 끝을 환자의 입에 넣었습니다. 관의 다른 쪽 끝은 물을 채운 용기에 담가 온도는 따뜻한 고기의 배출량에 의해서 측정됩니다. 마찬가지로 맥박의 정량 결정이 필요했는데 그때까지의 맥박 이론은 맥의 성질을 기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으나 일정 시간 동안의 맥의 숫자야말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16세기 말의 시계는 초침이나 분침이 없어 산토리오는 맥박을 재는 특수한 기계로 '맥파계(pulsilogium)'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진자로 실에 납으로 만든 구슬이 달린 것으로 실의 길이를 조절하여 맥박과 같은 주기로 진자가 진동하게 했습니다. 이 길이는 맥박수의 객관적인 측정치가 되었습니다. 또한 산토리오는 공기 중의 습도를 측정하는 습도계도 만들었습니다. 이외에도 환자가 누운 채로 노력 없이 목욕을 할 수 있는 기계와 기관 절개를 행하거나 방광에서 돌을 꺼낼 때 쓰는 투관침도 만들었습니다. 산토리오의 생각은 하비와 같아 그는 질적인 관찰에서 양적인 관찰로 나아갔습니다. 두 사람 모두 기계적으로 생각했고, 생물학적 현상과 확고한 무기질 세계의 법칙을 연결하고자 시험했습니다. 그들은 동시대 사람이었지만 산토리오는 하비보다 열다섯 살 나이가 많았으며 그의 주요 저서는 '심장과 혈액의 운동'보다 14년 전에 간행되었습니다.
후계자들은 하비의 승리를 인정했으며 하비를 새로운 생리학, 정밀한 생물학의 창립자로 보았습니다. 하비는 사람들을 열중하게 만드는 문제로 극히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문제를 새로운 방법을 통해 효과적으로 해결하여 몇 세기 동안 잘못된 학설을 새롭고 올바른 학설로 바꿔놓았고 명쾌한 모델이 되는 연구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켰습니다. 인 연구는 중요한 것을 생략하지 않고 전 영역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산토리오도 같은 방법이었지만, 불감증설은 혈액 순환에 비하면 흥미롭지 못한 주제였고, 그가 기록한 수치에 모순이 있어 이 영역의 정확한 계산이 가능하기까지에는 몇 세기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그의 '의학정력학 이론'은 경구로 기술되어 간결함이 있지만 불명료해지는 것이 단점이었습니다. 실험 방법과 계산에 대한 상세하고 정확한 기술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관찰과 새로운 기계에 대한 기재는 다른 저작에 포함되었으며,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에 대한 장황한 주석 및 특히 아비센나의 '의학의 규범'의 첫 번째 책 첫 번째 부분에 대한 주석이 묻혀 있습니다.
산토리오는 위대한 발견을 한 천재였지만 저작에 대한 방법을 몰랐기에, 그의 기구가 수정되고 개량되어 되살아나 의학의 학문 및 실천을 풍요롭게 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그리 오래 뒤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산토리오는 현대 의학에 공헌한 건설적인 천재들 사이에서 명예로운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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