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야기

윌리엄 하비 : 1578 ~ 1657, 현대 생리학의 시작

좋은집 이야기 2021. 9. 21. 14:00

윌리엄 하비 William Harvey, 1578.04.01 ~ 1657.06.03, 현대 생리학의 시작, 혈액순환의 발견자

출처: 픽사베이, pixabay

 베살리우스는 파도바에서 한동안 가르치며 그가 뿌린 씨앗은 훌륭한 과실을 맺었습니다. 그의 후계자 중 한 사람인 콜롬보(Colombo)는 혈액이 심장에서 흘러나와 폐에 이르고 폐를 지나 심장으로 되돌아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 사실은 스페인 의사이자 신학자였던 세르베투스(Servetus)가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1553년 제네바에서 칼뱅에 의해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콜롬보에 이어 팔로피오(Fallopio)가 파도바의 해부학 교수가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팔로피오관(난관)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1562년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제자인 파브리치오(Fabrizio, 라틴이름은 파브리키우스)는 파도바를 해부학 연구 분야에서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해부학자뿐만 아니라 외과학에서도 명성이 높았는데, 자신의 비용으로 해부학 연구실을 설립했고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으며 긴 생애 동안에 수많은 발견으로 해부학 지식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것은 정맥에 변이 존재한다는 점을 밝힌 것이었습니다. 이 외에서도 파브리키우스낭(Fabricius's bursa)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파브리키우스는 1537년에 태어나 1619년에 사망했습니다. 세기가 바뀌었고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근명한 사람은 젊은 영국인 하비였습니다. 하비가 파도바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 곤빌 칼리지(Gonville College)의 키스(Caius, 라틴어로는 카이우스) 밑에서 배웠습니다. 이 칼리지는 현재 곤빌, 키스 칼리지 혹은 키스 칼리라고 불립니다. 키스는 파도바에서 배운 베살리우스의 제자로 하비가 캠브리지에서 외과학 학사가 되자마자 바로 파도바로 옮겼으며, 1602년에 의학박사가 되었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런던에서 의료를 시작하여 1609년 성 바솔로뮤 병원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그는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파도바의 해부학 연구실에서 연구한 사람은 이후의 생에서 해부학에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하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해부학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것은 운동이었습니다. 그의 독창적 연구의 출발점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기본적 운동 즉, 맥박과 호흡이었습니다. 

 갈레노스에 의하면 섭취한 음식은 가장에서 처리되어 혈액이 되며, 혈액은 여기서 체내로 들어가고 혈관의 신비한 왕복운동에 의해 옮겨지고 일부 혈액은 심장 오른쪽으로 들어가 거기서 좌우 격벽에 있는 구멍을 통해 심장 왼쪽으로 들어가 체내를 돌고 간장, 심장, 뇌의 혈액에서 생체 활동을 조절하는 프네우마(정기)가 포함되어 있다고 갈레노스 가르쳤습니다. 또한 혈액은 심장에서 폐로 흘러들어 가서 생체의 찌꺼기를 거기에 버리며 공기는 폐에서 심장으로 보내져 혈액을 충분히 식히고 혈액에 프네우마를 공급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연구를 통해서 많은 오류가 밝혀졌습니다. 우선 격벽에는 구멍이 없어서 혈액은 갈레노스가 말한 것 이외의 경로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 중요한 점에 의해서 이 학설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무너져 내렸지만 이것은 대신할 마땅한 학설이 없었습니다. 프라카스토로가 '심장의 운동은 신만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동시대 사람들의 의견이었습니다. 다른 문제, 즉 형태학 문제는 동력학적인 문제보다 더욱 절박했습니다. 

 그러나 프라카스토로 시대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흥미를 끄는 것은 기능이지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파브리치오는 이미 순수한 형태학적 문제에 만족하기를 거부하고 장기에 대해 기재함에 있어 기능을 언제나 문제로 삼아왔습니다. 그래도 그는 너무나도 강한 습관의 주문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나 갈레노스의 권위를 무시한 책 행동할 수는 없었으며 그들에게 종속되어 있었기에 자신의 발견에서 논리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습니다. 혈액의 운동에 관한 문제는 하비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과학적 기록만으로는 답을 찾기 어려워 자연 그 자체에 묻기로 하여 몇 년 동안이나 연구를 계속하며 80종류 이상의 동물을 해부하며 심장의 박동을 보기도 하고 만지기도 했습니다. 1615년에 그는 런던 의학대학 교수에 임명되어 이듬에 강의를 했습니다. 그 초고가 현존하는데 혈액운동의 비밀을 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이전까지의 학설과 전혀 다르고 새로운 것이어서 출판하기 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사이 의사로서의 명성이 높아져가서 1681년에 왕 제임스 1세의 시의가 되었고 국왕 찰스 1세의 시의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1628년 프랑크푸르트의 출판사를 통해 '동물의 심장 및 혈액의 운동에 대한 해부학적 연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혈액의 순환이 발견된 것입니다. 심장의 왼쪽에서 혈액은 동맥을 통해서 체내의 모든 부분으로 흐르고, 하비의 생각에 의하면 조직의 틈새를 지나 정맥으로 들어가 정맥을 통해서 심장의 우심방에 달하며, 여기서 우심실로 들어갑니다. 뒤이어 혈액은 폐로 흘러가 폐정맥을 지나 다시 심장, 이때에는 좌심방과 좌심실로 돌아갑니다. 당시는 심방을 심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비는 기본적인 설명과 직접 관찰하여 증명할 수 있는 것만 기재에 만족했는데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하비는 해부학자로 해부학에 관한 논문을 썼고 그의 해부학은 '살아 있는 해부학', 즉 생리학이 되었습니다. 이것도 이전까지 존재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생리학이었습니다. 이후 생리학은 해부학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되어, 해부학적으로 가능할 때에만 생리학적 설명이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하비의 발견이 처음에는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생각은 동료 학자들에게는 낯선 것이었으나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해에 걸쳐서 하비는 발생학에 전념했고 부화의 각 시기에 있는 계란을 깨서 해부했습니다. 1651년 '동물의 발생'을 간행합니다. 이처럼 하비는 과학 연구에 있어 언제나 동적 주의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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