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야기

페르가몬의 갈레노스 : Claudios Galenos, 의학의 황제

좋은집 이야기 2021. 9. 12. 14:00

페르가몬의 갈레노스 : Claudios Galenos,Claudius Galenus - 의학의 황제

 갈레노스처럼 평가가 크게 변한 위대한 의사도 없을 것입니다. 갈레노스는 활발하게 의료를 행하기는 했지만 생전에는 여러 뛰어난 의사들 중 한명이었습니다. 중세에 그의 저작은 규범처럼 되어 권위를 얻었고, 그에 상당하거나 뛰어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뒤이어 르네상스 시대가 되자 평판이 떨어져 비판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그를 반대하는 운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의학사 연구자의 대부분이 그를 거짓 예언자라고 말하며 참된 예언자인 히포크라테스와 대비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논쟁을 생각해보면 그의 개성 및 가르침을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히포크라테스 전집' 중 하나를 교사를 학생들과 함께 읽으면 그 교실이 열의로 넘쳐흐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레노스의 저작 중 하나를 연구 과제를 삼으면 첫 번째 문장부터 격렬한 반론을 듣게 됩니다. 읽는 사람은 본의 아니게 '악마의 대변자'가 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고발적 태도 아래서 참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에 대한 견해가 이처럼 다릅니다.  독일의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행한 아탈로스 왕조의 고대 수도였던 페르가몬에, 2세기경 니콘(Nicon)이라는 기술자가 살았는데 그는 교양 있는 사람으로 철학, 수학, 자연과학에도 통달해 있었고 그는 정직하고 평정하고 온화했습니다. 그는 여유가 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불행한 결혼만 하지 않는다면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성격이 나빴으며 종종 하녀에게 포악하게 굴었고 소크라테스의 악처 크산티페(Xa nthippe) 이상으로 남편에게 잔소리를 했습니다.' 129년 여름에 이 어울리지 않는 부부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아이의 이름을 갈레노스라고 지었습니다. 그리스어로 '갈레노스'란 바다가 조용하고 파도가 없고 바람 때문에 수면이 어지럽지 않은 '조용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진심 어린 희망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갈레노스는 머리가 좋고 아버지 니콘으로부터 세심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페르가몬의 철학학교에서 여러 가지 철학 대계를 배워 숙달했지만, 그의 공부는 그 영역에 국한되지는 않았습니다.  갈레노스가 18세가 되었을 때 니콘은 꿈을 꾸고 난 뒤 아들을 의사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 무렵 사람들은 죄 갚음, 속죄, 죄로부터의 해방을 강하게 희망하기에 열중했습니다. 그들은 의심이 많았던 극자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처럼 아스클레피오스(그리스어로 아이스쿨라피우스, Aesculapius)를 비웃지 않았습니다. 페르가몬에 이 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모신 유명한 신전이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기적 치료가 행해졌고 실제 후에 갈레노스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치료받았습니다. 그러나 치료 신전의 성직자 외에, 페르가몬에는 평범한 진료의사도 있었습니다. 갈레노스는 해부학 책의 저자이고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저서에 대한 해설자이기도 했던 사티로스(Satyrus)와 스트라코니코스(Straconicus), 아에스크리온(Aeschrion)으로 부터 많은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학생으로 가장 먼저 알게 된 질병의 첫 번째 예는 생애를 통해서 강렬한 인상을 주어 수십 년 후가 되어서야 갈레노스는 초기의 관찰을 종종 자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위대한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고는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공부했습니다. 의사에게는 자신의 병이 커다란 공부가 되기에 갈레노스는 스스로의 증상을 날카롭게 관찰했습니다.  갈레노스가 20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이상 페라그몬에 머물 이유가 없어져 우수한 선배 의사들처럼 여행을 떠나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도회를 관찰하여 이전까지는 본 적이 없었던 질병과 새로운 치료법을 배웠습니다. 148년부터 157년까지 9년 동안 여행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가까이 있는 스미라로 가서 펠롭스(Pelops)와 그 외의 유능한 의사들 밑에서 공부했고 그리스 본토로 가서 한동안 코린트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거의 궁극적인 희망은 이집트였고 알렉산드라였습니다. 이 시기에도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명한 대학이 있었기에 갈레노스가 특별히 흥미를 가지고 있던 해부학 연구를 하는 데 고대 세계에 있어서 최고의 장소였습니다. 헬로필로스나 에라시스트라토스의 시대에서 약 5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환자의 장기를 손에 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해부학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하등동물의 연구로 대처해야만 했지만 뼈에 대한 공부를 하기에는 알렉산드리아가 적합했습니다. 이집트는 여러 가지 점에서 훌륭한 나라였습니다. 157년 갈레노스는 페르가몬으로 돌아왔습니다. 매해 여름 수도인 페르가몬에서 열리던 검투사 대회가 시작되기 직전이었습니다. 준비는 끝났으나 검투사들을 보살필 외과의가 없어 대회를 주최한 최고위 성직자는 갈레노스를 이 자리에 임명했습니다. 검투사 대회가 시작되자 많은 부상자가 나왔지만, 갈레노스 간호 덕분에 모든 부상자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3년 연속해서 검투사의 외과의가 되어 검투사의 훈련도 지도를 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그는 식양생의 이론과 실제에 대해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마을에서는 니콘의 아들이 훌륭하게 성장한 것을 기뻐했으며, 수많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지우와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조언을 구했고 의료 활동을 하면서 철학과 저술 활동도 했습니다.  161년 임명 기간이 끝나고 문명세계의 수도인 로마로 행했습니다. 트로아스를 배로 출발해서 렘노스 섬을 지나 테살로니카를 거쳐 162년 초에 로마의 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로마에서 의사를 하는 사람들은 싸고 상대를 비난하는 시대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유명한 에우데모스(Eudemus)가 말라리아로 상태가 악화되어 결국 목숨까지 위험해지자 갈레노스를 떠올리게 됩니다. 병은 그가 예상한 대로 진행되었고 환자는 회복되고 갈레노스는 단번에 유명해지게 됩니다. 신분이 높은 환자들이 그의 조언을 구했고 집정관 플라비우스보에투스(Flavius Boethus)의 아내는 여성 특유의 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는데 갈레노스는 그녀를 치유했고 그 집안의 주치의가 되었습니다. 그는 해부학에 흥미를 가지고 있어 해부실이 만들어졌고 속시사들과도 계약하여 이렇게 갈레노스의 해부서가 편집되었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직전 로마를 떠났지만,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로마를 떠나 있었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설득하여 로마에 남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을 로마에 머무르면서 의료, 강의, 교육, 토론으로 나날을 보냅니다. 궁정의를 하면서 테리아카(theriac, 수십 종류의 약재를 벌꿀에 개어 만든 고약으로 독이있는 짐승에게 물렸을 때 사용하는 해독제)를 황제에게 주는 것이 임무였고 종종 진찰을 하기도 했습니다. 192년 서재가 불에 타서 갈레노스의 저술 중 없어진 것도 있었습니다. 199년 그는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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