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야기

비티니아의 아스클레피아데스 : 기관절개술의 창시자

좋은집 이야기 2021. 9. 10. 14:00

비티니아의 아스클레피아데스 : Asclepiades B.C. 5세기

출처: 픽사베이

 가장 오래된 학파인 히포크라테스 학파 의사들은 그리스 세계의 주변에 있었다.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아프리카 북부, 에게 해, 소아시아에, 다음으로 아테네에 살고 있던 디오클레스가 나타났습니다. 헬로필로스와 에라시스트라토스가 뒤를 이었고, 그들의 연구는 알렉산드리아의 의학상으로 명성을 얻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로마가 의료의 중심이 되어 이후부터 의학의 발전은 로마 공화국 및 로마제국의 수도와 과련이 있습니다. 로마는 서양 세계계의 중심이 되었고, 숨길 수 없는 매력을 드러내게 됩니다. 자심에게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여 출세를 바라는 사람들은 로마로 왔고, 다른 영역에 비해서도 의료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선 이전까지 로마 의학은 그렇지 못했는데 다른 장소와 마찬지로 종교적, 주술적인 생각과 경험적 지식이 섞인 것이었습니다. 열이 나는 사람은 열의 신에게 기도했고, 임신한 여성은 카르멘타(Carmenta)여신이나 루키나(Lucina)여신에게 제물을 바쳤습니다. 공화국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통증, 기침, 설사에 대한 가정요법이 있었는데 양배추는 가치가 높은 약으로 여겨졌습니다. 상처에 대한 치료와 부러진 뼈에 부목을 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방법이 효과가 없을 때는 주술 같은 방법에 의존했습니다. 수많은 노예를 가진 사람은 일반적으로 그 가운데 의학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노예를 포함시켰고 그런 노예는 몸값도 비쌌습니다. 

 세월이 흘러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했고, 그리스 사람들이 로마로 왔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 문화의 뛰어난 면을 배웠습니다. 그리스 문화는 유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로마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는 경향이 있으나 점점 그리스의 매력에 매료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 의사들이 로마로 이주해 왔습니다. 처음으로 아르카가토스(Archagathos)가 기원전 219년에 펠로폰네소스에서부터 도착했습니다. 그는 노예가 아닌 자유민이었으며 로마의 의사들보다 학문이 깊었습니다. 특히 외과의로서 유명했으며 높은 평가를 얻었기에 의료를 행하기 위한 몇 개의 방을 제공받기도 하고, 조금 더 중요한 일로는 그리스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시민권을 주기도 했습니다. 대담한 수술로 한동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메스를  너무 많이 사용하게 되어 사형집행자라는 별명까지 얻게 됩니다 아르카가토스는 수많은 그리스 이민 중 최초의 의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주한 것은 의사나 외과의뿐만 아니었으며 산파, 가짜 의사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주민들은 신용을 얻지 못했지만 그 가운데 한 명이 로마에 그리스 의학의 지반을 다지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가 바로 비티나아의 아스클레피아데스였습니다. 그는 매우 진취적인 기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철학과 의학을 그리스에서 배웠으며 아마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배운듯하고 곳곳의 도시에서 의료를 했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계속하다 기원전 1세기 초엽에 로마에 왔습니다. 처음에는 의사로서가 아니라 웅변가로서 찾았습니다. 외국인 의사는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수사학 교사의 수요는 있었습니다. 정치가나 법률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뛰어난 언변으로 상대를 설득하여 자신을 믿게 만드는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아스클레피아데스는 로마에서 웅변술의 선생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그의 웅변술 학교로 모여들었고 안정기에 들어서자 그는 자신은 의사라고 발표했는데 웅변 능력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각 질병의 치료에 두 가지나 세 가지의 치료법, 익숙한 치료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의사는 무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자신은 이와 같은 치료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 치료법은 다른 의사들이 쓰는 것처럼 강한 설사약이나 구토약이 아니었고, 단식, 금주, 마사지, 운동을 처방해서 치료했습니다. 그가 유명하게 된 것은 장례식 행렬이 그의 앞을 지나갈 때 사체가 장작 위에 놓여있었는데 그 남자가 죽은 것이 아녔습니다. 그것을 아스클레피아데스는 그 남자를 장작 위에서 끌어내려 되살려냈습니다. 그 후 환자들은 그에게 몰립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여겨집니다. 권력자들이 그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키케로(Cicero), 크로이소스(Croesus), 아티쿠스(Atticus),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의 환대를 받는 손님이 되었습니다. 거절하긴 했지만, 그 명성이 로마의 벽을 넘어 폰토스의 왕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가 그를 궁정의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대신 저서의 복사본을 보내주었습니다. 아스클레피아데스는 약 스무 권의 제목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허세가 없고 경험주의자도 아녔습니다. 경험이 가르쳐주는 것에 충분한 경의를 표했지만 치료를 지도할 이론이 의학에 필요하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연의 작용은 연구에 의해서 이해되었으며 타당한 치료법은 질병의 특성에 의해서 분명해졌습니다. 선구자들이 기록한 내용의 대부분이 잘못되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물론 에라시스트라토스는 진리에 접근해 있었지만 그 역시 오류가 많았습니다. 

 아스클레피아데스는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폰티쿠스의 헤라클리데스의 학설, 에피쿠로스(Epicurus)의 인식론, 스토아 ㅍ학파의 학리를 충분히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의 시스템을 생각했습니다. 생체는 이산된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르쳤으며 원자는 서로 끌어당기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는데 이 운동에 의해서 상호 충돌한다고 말했습니다. 원자와 원자 사이에는 틈새(pores)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건강은 이들 근원 입자의 크기, 모양, 숫자의 적당함과 정연한 운동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틈새가 적당한 크기라는 점도 중요한 것입니다. 질병은 원자의 운동 및 정지와 틈새의 막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생명체에는 체액과 프네우마가 있습니다. 체액과 프네우마의 장애로 질병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원자가 주요한 결정 인자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치료법의 핵심은 반대는 반대로 다스린다의 원칙입니다. 원자의 운동이 정지되었을 때에는 적당히 운동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질병은 주로 기계적인 이유로 일어나기 때문에 기계적인 치료가 가장 중요합니다. 아스클레피아데스의 치료는 원칙적으로는 기계적이었습니다. 생체에 작용하는 힘은 열, 냉, 일광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물로 병을 고치는 수료법으로 물을 체내에 넣기도 하고 외부에서 작용시키기도 했습니다. 모든 종류의 수욕, 마사지, 운동을 사용했고 엄격하게 규정된 건강한 생활방식을 수반했습니다. 그는 전문서를 기술했습니다. 

 아스클레피아데스가 뛰어난 의사이자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책에 남아 자신만의 노선을 나아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기원전 46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로마에 정착한 모든 그리스 의사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습니다. 로마에서 의사들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스클레피아데스는 자신이 병에 걸리면 자신을 의사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는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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