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야기

에페소스의 소라누스 : A.D. 2세기 진단법 확립

좋은집 이야기 2021. 9. 11. 14:00

에페소스(에페소, Ephesus)의 소라누스, Soranus, A.D. 2세기 진단법 확립

 병의 치료에 결정적이고 결정적이어야 하는 것은 병의 원인이 아니라, 일반적 증상으로서 인식할 수 있는 기본적인 틀입니다. 이 기본적인 특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긴장상태', '이완상태', 그리고 '혼합 상태'인데, 긴장상태는 틈새(pores)가 좁아지고, 이완상태는 틈새가 커지며, 혼합 상태에서는 어떤 신체 부분에서는 틈새가 좁고 다른 부분에는 커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피부가 건조해져 분비물이 적고 고열이 나면 그때는 긴장상태이고, 만약 증상이 반대라면 이완상태입니다. 치료의 목적은, 전자의 경우 틈새를 이완시키고 후자의 경우에는 긴장시키는 것입니다. 테미슨은 아스클레피아데스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식양생과 물리요법에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방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하는데 첫 번째는 개입을 행하는 병의 시기, 두 번째는 병이 만성인지 급성인지 판단하는 것입니다. 테미슨은 만성병은 사람들이 믿어온 것처럼 급성 시기가 만성의 경과를 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본질적으로는 만성적 성질을 가진 많은 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학설로 인해 의학을 단순하게 정식화할 수 있었습니다. 법칙이 만들어지고 방법이 확립되어 쉽게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에서 유행한 이 학파의 신봉자들은 자신들을 '방법 학파(메소디스트, methodisers)'라 불렀습니다. 그들의 학설은 매우 단순했기 때문에 허풍을 떠는 사람들을 낳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터키의 남서부 트랄렐스(Tralles)의 테살로스(Thessalus)는 네로(Nero) 시대의 방법 학파 중 한 사람이었는데 6개월 만에 의사를 육성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리디아에 살던 직공의 아들로 로마에 와서 주로 대장장이, 구두공, 도장공 등 수공업자들과 사귀었는데 환자를 왕진할 때 그들을 데리고 가서 의사로 만들었습니다. 의학을 자세히 공부해온 의사들은 이들 가짜 의사를 '테살로스의 멍청이'라고 부릅니다. 테살로스 자신은 자만심이 강하고 비상식적이었습니다. 자기 이전에 의술에 대해서 기술한 것은 난센스이며 히포크라테스는 거짓말쟁이 이상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참된 치료술은 트랄레스의 테살로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여러 종류의 저작물을 썼는데 그중에는 식양생에 관한 한 권과 외과학에 관한 책이 있습니다. 사후에도 이름이 남도록 자신의 무덤에 '이아트로니케스(latronices)-의사들의 정복자'라고 쓰게 했습니다. 

 테살로스는 방법 학파에 속해 있었지만 체계를 확대했고 특히 만성병의 치료에 대해서는 이것을 2단계로 나누었습니다. 만성병 때문에 종종 조직이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서 변화한다는 사실을 테살로스는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치료의 목적은 장기를 다시 건강한 방향으로 되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환자는 장기간에 걸친 병 때문에 약해져서 격렬한 치료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오늘날 강장 요법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료 식양생이며 그 외에는 물리적 요법도 행했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환자의 힘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특효가 있는 자극요법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생체의 힘을 돋우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여러 가지 이용되었는데 어떤 치료법은 식양생인데 재료를 주기적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다른 경우 설사를 하게 하는 강력한 약을 사용하고 그 뒤에 여러 가지 자극을 주기도 했습니다. 다른 요법은 대기가 변화하도록 전지 요법을 처방하여 신체의 영양 과정이 완전히 바뀌기를 기대했습니다. 요즘도 행해지고 있고, 화학요법이 없던 시절 결핵환자를 산속에 보낸 것과 같은 생각에 기초한 것입니다. 

 원칙을 채용하면서도 거기에 확고한 과학적 기초를 부여하고 동시에 선구자들보다도 폭넓은 시야를 적용한 폭넓은 의학 경험을 가진 천재가 바로 에페소의 소라누스로 가장 뛰어난 대표자였습니다. 소라누스는 교양이 없는 채로 출발한 테살로스와는 많은 점에서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전반적인 교육을 받아 의사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철학자이자 문법학자이자 영혼에 대한 상세한 전문서의 저자이기도 했습니다. 테살로스는 이전의 의사들을 무시했지만 소라누스는 되돌아보고 그들을 존경했습니다. 어떠한 경향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그들의 경험을 배우기 위해서 그들의 저작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열 권의 전문서에 과거의 위대한 의사들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록했습니다. 소라누스의 생애에서 알려진 것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를 마친 뒤, 트라야누스(Trajan) 및 하드리아누스(Hadrian) 시절, 즉 2세기 초반에 로마에 왔다는 사실 정도지만, 당시 많은 의사들에 비해서는 잘 알려진 것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이나 라틴어로 번역된 그의 저작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으로 그의 저작은 명료, 간결, 인상적이며 쓸데없는 과장이 없습니다. 그는 광범위한 '병리학 각론 및 치료학' (즉 내과학)을 정리하고 방법 학파 입장에서 질병을 만성과 급성으로 구분하여 다루었습니다. 이 대작은 5세기와 6세기에 이름이 높았던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us)에 의해서 라틴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번역은 현존하고 있는데 각각의 질병에 대해서 방법 학파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했으며 어떻게 치료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의학사 연구자에게는 보고와도 같은 것입니다.

 소라누스는 다수의 임상지도를 위한 저술도 했는데, 위생학 전문서, 약리학에 대한 저작, 외과 임상을 위한 편람, 붕대 술에 대해 도시한 소책자 등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소라누스는 조산술 및 부인과학에 대한 교과서의 저자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고대의 유능한 부인과 의사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 교과서는 대부분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데 훌륭한 것입니다. 고대에 소라누스 이전이나 이후에도 우수한 부인과 의사가 있었겠지만 그들의 저서는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그는 우수한 내과의는데 외과의로서 널리 치료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외과학에 대한 저작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소라누스는 방법 학파의 절정을 표현했으며 고전, 고대의 이 뛰어난 인물은 중세의 초기에까지 의학에서의 우위를 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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