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야기

요한 프랑크 : 공중보건의 선구자, 러시아 황제 주치의

좋은집 이야기 2021. 9. 8. 02:00

요한 피터 프랑크 Johann Peter Frank, 1745.03.19~1821.04.24

 1766년 프랑크는 하이델베르크 대학(University of Heidelberg)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바덴의 피르마젠스 근처에 있는 로달벤에서 태어나 독일과 프랑스 문명의 경계로 전쟁이 거듭된 곳에서 자랐습니다. 할아버지는 프랑스인으로 군대에 물품공급을 하는 상인이는데 전장에서 약탈자들에게 목숨을 잃게 됩니다. 아버지는 결혼하여 13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상황은 학자로 생활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프랑크는 라슈타트의 성직자 수도회와 보켄하임의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고 바덴, 메스, 프랑스 북동부 퐁타무송에서 철학과 자연과학을 배워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나 의학에 대한 관심으로 하이델베르크와 스트라스부르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학박사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식양생에 관한 논문은 그가 의학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다루는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의학부장은 특별한 연구를 하라고 하고 그것을 '의사 행정'으로 부르기로 합니다. 의학 문제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건강 증진 방책을 실행하는 것이 주로 국가 행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의사 행정이 중요하지만 쉬운 일은 아닌 것으로 일반인들의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을 지배자에게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때 프랑크는 21세로 평생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요 저서인 '완전한 의사 행정의 체계'의 마지막 권이 1817년에 간행되었을 때 그는 72세였습니다. 수많은 변화와 사건이 있었지만, 이 책의 집필은 일관되었습니다. 프랑스 면허가 없는 상태로 개원을 하여 당국이 개입하자 퐁타무송으로 돌아가 프랑스 의사 면허를 취득하여 비쉬에서 개업하고 결혼도 합니다. 2년 뒤 바덴으로 옮겨 지역 의사가 됩니다. 그의 아내가 분만으로 인해 생긴 상처를 통해 세균이 침입한 질환인 산욕열(puerperal fever)로 사망합니다. 게른스바흐에서 발진티푸스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크는 그곳으로 보내졌고 역병을 연구할 기회를 얻습니다. 여기서 그는 바덴바덴 변경백의 시의가 되어 라슈타트 궁정 생활을 하게 되어 '백성들의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을 지배자에게 가르칠' 기회를 얻게 됩니다. 프랑크는 정력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우선 조산부와 외과의를 교육할 계획을 작성했습니다. 후원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영지는 카를수르에의 바덴 두를라흐 계열로 옮겨져 새로운 지배자에 의해서 '조산부 및 지역 산과의의 관리자'로 라슈타트에 머무르게 됩니다. 4개월 뒤 그는 브루흐잘로 옮겨 영주 주교인 슈파이어(Spires) 밑에서 도시 및 지역의 의사가 되었으며 1775년에는 시의가 됩니다. 그는 조산부를 잘 교육할 수 있도록 돌봐주어 시의 사망자는 85명당 1명에서 125명당 1명으로 감소했고, 외과의 학교를 창립하여 교원이 됩니다. 1776년 '체계' 의 제1권을 간행했습니다. 

 그리스의 정신과 로마의 조직능력이 고대 고도의 위생 체계를 만들어냈지만, 민족이동으로 고전 시대의 위생학은 소멸됩니다. 고대의 개인위생, 수많은 목욕탕, 연고, 운동 등은 의미 없는 유약함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위생학에 대한 생각은 중세 후기의 도시에서 되살아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중위생 상태는 빈약했고 젊은이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습니다. 천연두, 디프테리아, 결핵, 마진, 산욕열, 티푸스, 말라리아에 의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공포를 가지고 있었고 해결책이 필요했습니다. 18세기가 되자 공중위생을 촉진시키려는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의사들은 예방이 치료보다 좋다는 사실, 예방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업무임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두 가지 방법 보수적 방법과 혁명적 방법이 있습니다. 프랑크는 보수적인 흐름의 대표로 그의 작업은 절대국가, 계몽 전체 정치 위생의 기념비입니다. 실제 그의 책은 민중에게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방법보다는 당국에 의한 것이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국의 수도에서 높은 지위를 얻었고, 빈 대학의 임상 및 세계에서 가장 큰 병원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시의인 슈티프트(Stifft)가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교회는 성직자의 독신생활에 대하여 쓴 내용 때문에 적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최종적으로 프랑크는 다시 여행을 떠나 병리학 교수에 임명되었던 아들 요제프와 함께 임상가로서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 대학으로 옮겼습니다. 거기서 1년을 머물다 차르(Tsar)의 시의 및 의학 및 외과학 아카데미의 총재가 되어 높은 급여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초빙됩니다. 프랑크는 러시아의 수도에서 3년 일하다가 소화기 계통의 전염성 질환인 적리에 걸립니다. 그는 러시아에 지쳐서 쉬고 싶어 졌습니다. 저작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독일의 조용한 장소인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에 머물기로 합니다. 건강을 회복하고 1809년 빈에 도착하였으나 나폴레옹이 빈을 공격하였습니다. 란느 원수가 에르페른 에슬링에서 양쪽 다리에 총을 맞아 프랑크에게 진료 의뢰를 합니다. 하지만 그는 통풍을 앓고 있는 노인으로 나폴레옹 주치의 코르비자르가 경쟁자가 더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을 예상하여 프라이부르크로 갑니다. 그의 주요 저서의 제5권의 급속도로 전진되었으나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어 1811년 제5권 완성하고 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빈에 머물며 개업을 했고 주요 저서의 제6권을 저술했습니다. 이 책은 그의 작업의 프레스코인데 '의료 일반에 대하여, 그리고 국가 복지에의 영향에 대하여' 및 '의학교육시설에 대하여'였습니다. 프랑크는 빈 회의 이후 6년 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럽에서는 왕정복고가 행해졌고 위생의 영역에서 침울한 반응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계몽시대에 만조를 이루었던 공중위생은 썰물을 타게 되었고 국가는 절대주의의 권력을 잃습니다. 부르주아는 부자가 되었지만 공중 복지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표면 밑에서 새로운 혁명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는데 바로 산업혁명입니다. 새로운 위험이 민중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었고, 예측할 수 없는 문제가 나타났기에 활발한 해결이 요구되었습니다. 19세기 중엽을 향해 새로운 위생학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전문가는 프랑크의 되돌아보았는데 그의 논문은 18세로부터 건네받은 당당한 기념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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