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헌터 : 외과학의 개척자 John Hunter, 1728.02.13 ~ 1793.10.16
존 헌터는 10명의 형제자매들 중 막내로 태어나 3명은 어렸을 때, 4명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습니다. 당시 사망률을 반영이 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남부 래너크셔(Lanar-kshire)의 소지주였는데 존이 막내였기 때문에 이미 나이가 들었고, 어머니 아그네스 헌터는 아들의 버릇없는 행동을 전부 받아주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못하는 학생으로 학교생활이 길지 않았고, 변덕이 심하고 성격이 까다로웠으며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면 몇 시간씩 울곤 했습니다. 좋아하는 일은 숲을 돌아다니며 새의 알을 찾는 것과 어른들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존은 나중에 어렸을 때 구름에 대해서, 풀에 대해서 그리고 가을이 되면 잎의 색이 왜 변하는지에 대해서 알고 싶었고, 개미, 꿀벌, 새, 올챙이, 물 여우를 관찰했는데 나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나 흥미를 갖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질문을 해서 사람들을 괴롭혔다고 했습니다.
20세가 된 헌터가 할 수 있는 것은 병사가 되는 것이었으나 다른 것을 시험해 보기로 합니다. 형 윌리엄은 가족들의 자랑거리로 런던에서 살고 있었는데 존 헌터보다 열 살 위로 글래스고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외과의로 해부학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1948년 존은 런던에 가서 윌리엄 헌터의 조수가 됩니다. 그해 초부터 윌리엄은 외과수술의들에게 해부학의 개인 강의를 하고 해부 교시를 하고 있었는데 존이 윌리엄의 조수로 열정을 보였습니다. 하루 종일 그리고 밤까지 일하고 해부실을 정돈하고 필요한 사체를 확보하는 일이 숙달되어 능숙해집니다. 존에게 있어 형 윌리엄은 해부학자 그리고 외과이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선생님이었습니다. 윌리엄의 '사람의 임신 자궁에 대해서'(The Anatomy of the Human Gravid Uterus)라는 책은 1774년 라틴어로 출간되었습니다. 윌리엄은 열정적인 수집가로 해부학 표본뿐만 아니라 서적, 원고, 메달, 그림을 모았는데 이 서적과 해부 표본의 수집물은 그래스고 대학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수집 열정은 동생 존에게도 영향을 주어 평생 계속 되게 됩니다. 존은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고 대학에 들어간 적이 없었으나 그 무렵 외과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첼시 병원의 수습생이 되었으며 후에 성 바솔로뮤 병원과 성 조지 병원(St. Bartholomew’s Hospital)으로 옮겼습니다. 존에게 있어 윌리엄 체슬던(Cheselden)과 포트(Pott)는 훌륭한 선생님이었으며 그는 몇 년 뒤에 외과에 정통하게 됩니다. 윌리엄은 존의 부족한 일반교육 보충을 위해 옥스퍼드에 보냈지만, 몇 개월 만해 돌아왔습니다. 그가 흥미롭게 생각한 분야는 따로 있던 것입니다. 최대의 열정으로 다시 해부학 연구에 전념하여 인간의 장기를 단순히 기재하는 것뿐 아니라 이해하려면 하등동물 장기에도 정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능한 한 많은 종류의 동물을 해부하게 됩니다. 해부학은 비교해부학이 아니면 안 되었습니다. 인간과 다른 동물의 장기를 비교해야만 비로소 정상이든 병적 상태든 생명의 일반 기능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비교해부학(comparative anatomy)과 발생학(Embryology)을 눈을 돌리게 됩니다. 발생학은 그가 흥미를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답을 줍니다. 동물은 발생 초기단계에서 보다 간단한 다른 동물에서 볼 수 있는 형태를 보이는 것일 아닐까요? 이처럼 정신없이 연구에 몰두하던 존은 1761년 폐렴을 앓게 됩니다. 형들 중 한 명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병동과 해부학실에서의 생활은 이 같은 질병에 노출이 잘 되는 것을 보고 한동안 그는 육군 외과의와 해군 외과의가 됩니다. 영국은 프랑스, 스페인과 전쟁을 하고 있었는데 존은 몇 개의 전투에서 종군하며 많은 경험을 쌓게 됩니다. 그의 마은 구조가 일반 군인과는 달랐는데 그는 과학자로 마음은 병리학 총론에 대한 문제로 가득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치료해야만 할 상처는 실험이었습니다. 성숙되기까지 수십 년이 걸려 사후에 출간된 책 '혈액, 염증 및 총상에 관한 연구'(A Treatise on the Blood, Inflammation and Gun-Shot Wounds)의 기초는 이 시기에 군의였기 때문입니다.
1763년 군대가 해산되어 존은 런던으로 돌아와 외과의가 됩니다. 그는 런던 서부 얼스코트(Earl's Court)의 대지주의 저택을 샀는데 많은 종류의 동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건물 뒤에는 초지로 여러 종류의 새들이 걸어 다녔고, 특히 거위의 알은 발생학 연구에 사용됩니다. 그리고 염소, 돼지뿐 아니라 뱀, 자칼, 표범 같은 야수도 있었습니다. 집은 생리학 실험을 위한 해부실이었으며 수집품을 보존하기 위한 방이 있었습니다. 헌터는 지속적으로 진귀한 동물을 찾았습니다. 아일랜드 거인을 위해서 엄청난 고생과 많은 돈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가 연구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을 위해 의료 활동을 합니다. 그의 식구는 점점 늘어 45명이 되었는데 자녀들, 조수, 하인, 정원사, 동물 사육사 등이었습니다. 수집에 막대한 금액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에는 수집품과 빚만 남았습니다. 1773년 가을 외과학 이론 및 실제에 대한 개인 강의를 했는데 강의하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그의 강의 내용은 외과 수술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오늘날 '외과학 총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당시에는 독립된 분야가 아녔습니다. 18세기 외과의에게 치료를 맡긴 병 중 하나가 매독이었는데 헌터는 이 어려운 문제에 몰두하여 대작을 내게 됩니다. 이것은 1786년 출간되어 19세기 이르기까지 표준 교과서로 사용됩니다.
헌터의 말년은 고충의 시간으로 아침 6시에 일어나 9시까지 해부실에서 일하고 정오까지 환자 진료 후 회진을 했고 4시에 점심을 먹고 1시간 잠을 자고 강의를 합니다. 새벽 1시, 2시 혹은 그것보다 늦은 시간까지 일을 했습니다. 몇 년에 걸쳐 협심증으로 고생했고 이 병으로 그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시대를 크게 앞서 나갔고 외과학과 의학 사이에 처음 다리를 놓은 선구자였습니다. 그가 연구하고 기술한 넓적다리의 모음근굴(내전근동)은 '헌터굴'이라고 부릅니다. 사망하기 6년 전 왕립학술원에서 가장 탁월한 학자에게 수여하는 코플리 메달(Copley Medal)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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