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야기

피에트로 다바노 : 1250~1315

좋은집 이야기 2021. 9. 16. 14:00

피에트로 다바노 Pietro d'Abano :1250~1315

출처: 픽사베이

 콘스탄티누스는 사람들의 흥미를 동쪽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의 번역은 의학 공부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습니다. 1085년 스페인 중부 톨레도는 카스티야(Castile) 왕국의 알폰소(Alfonso) 6세에 의해서 정복되었습니다. 무함마드 과학의 서쪽 수도를 기독교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톨레도에는 커다란 도서관이 있었으며 뛰어난 언어학자들이 많았고 그곳은 기독교 국가가 필요로 하는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2세기 후반, 이탈리아 사람으로 크레모나 출신인 지라르도(Girardo)는 톨레도로 가서 아라비아어를 배운 뒤 도서관을 찾아 돌아다녔고 발견을 거듭했습니다. 얻는 것은 기대 이상이었으며 그는 열심히 탐색을 행하여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번역가 그룹이 만들어져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많은 책들이 이들에 의해 번역되었는데 철학자, 수학자, 의사, 천문학자의 저작들이 아라비아어에서 라틴어로 옮겨졌습니다. 이렇게 서양은 아리스토렐레스, 유클리드(에우클레이데스), 천문학자 프롤레마이오스(Ptolemaios)를 완전히 소유할 수 있게 되었으며 라제스와 아비센나 및 그 외의 아라비아 의사들의 지식도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동양과 서양이 접촉하는 다른 장소에서도 아라비아어에서 라틴어로 번역이 행해졌습니다. 시칠리아 섬은 이와 같은 성과가 있었던 장소 중 하나입니다. 11세기에 새로운 문헌의 이입은 많지 않았지만 12세기에는 이와 같은 흐름이 커졌고 13세기에는 방대한 양의 기존 지식을 기독교 세계에서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들 지식의 보존과 완성은 유럽 각지에 세워진 젊은 대학들의 임무가 되었습니다. 12세기에는 몽펠리 의학교가 앞서 나가게 되었으며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볼로냐 대학이 창립되고, 13세기에는 파리와 나폴리의 대학 그리고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Universita degli Studidi Padova)이 창립되었습니다. 프라하, 빈, 하이델베르크, 퀼른, 에르푸르트 대학의 창립은 14세기에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전초 지점이었던 프로방스의 몽펠리에는 살레르노가 콘스탄티누스의 번역으로 비료를 얻은 것처럼 번역의 물결에 강한 영향을 받은 최초의 장소였습니다. 새로운 지식은 풍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너무 풍부하여 쉽게 이해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급하게 번역이 이루어져 제대로 된 라틴어가 아녔습니다. 아라비아어의 술어 중 많은 것들이 잘못 해석되었으며, 전혀 이해되지 못하여 후에 바로잡기가 어려웠습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문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시대의 산물로 역사적 입장에서 평가할 수 있었으나 13세기에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문서를 현존하는 것의 전체라고 생각하여 바로 의료에 사용하였고 당연히 어려움에 부딪칩니다. 질병에 대한 기재나 처방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스, 페르시아, 이집트의 조건에서 사용했던 것을 수정하지 않은 채 유럽 세계로의 이입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들 관습을 배우기 분명히 밝히고 모순을 제거하여 새로운 지식이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많은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아르스토텔레스가 그 방법 즉 변증법을 가르쳤습니다. 동양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양에서도 결과는 스콜라철학이었습니다. 갈레노스와 아비센나는 오류가 없는 권위자로 여겨져 의학자들의 마음을 지배했습니다. 중세 대학의 역할은 학설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반으로부터 지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아비노는 파도바 근처의 유황온천으로 유명한데 피에트로 다바노의 이름은 태어난 곳의 지명에서 유래합니다. 그는 중세 후기의 전형적인 박식가로 1250년 태어나 파도바에서 의학과 철학을 배웠습니다. 그가 유명했던 것은 그리스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것을 르네상스 이전에 흔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피에트로는 콘스탄티노플로 갔습니다. 이 제국의 수도의 당시 상태를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향하게 한 것은 지식욕과 그리스어를 통달하여 그리스어로 된 필사본을 연구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상당한 양의 갈레노스의 책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합니다. 다음으로 그가 파리에서 대학의 강사로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여기서 그는 의학과 철학뿐만 아니라 천문학과 인상학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깁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의 학설에 의문을 품고 오컬트(요술)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55가지 이상의 죄목을 들어 종교 재판소에 호소하였으나 무죄가 되었습니다. 

 14세기 초에 피에트로는 파도바로 돌아가 대학에서 능력을 발휘하는데 이 시기 단테도 파도바에 있어 두 사람이 알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피에트로는 당시 종교 재판소에 불려 갔고 재판 중에 세상을 떠났으나 화형에 처하지 못해 사체를 가져다 화형에 처합니다. 피에트로가 남긴 의학에서의 주요 저서는 '철학자와 특히 의학자와의 차이의 조정자'였습니다. 스콜라철학에서 의학은 '지식의 총화 중 일부로 의학은 교회의 우주관 중 일부를 이루는 것이자 신학의 시녀였습니다. 피에트로의 '조정자'는 의학의 관습에서 수많은 모순을 제거하는 것으로 목적을 삼아 일반적인 질문, 의학이론, 임상의 세부로 이루어진 체계적인 책입니다. 

 당시의 의술은 스콜라 학파 의사는 극히 제한된 정도로밖에는 자신의 경험에 흥미를 갖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경험을 갖고 있었으며 토론을 할 때는 개별의 의견을 자유 발언하고 기록에도 남겼을 것이지만 스콜라 학파 의사는 기본적으로 철학자였습니다. 사고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나 아라비아의 학자들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논리적인 사고방식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보고 그것의 도움으로 지식의 체계화를 노력했습니다. 피에트로 다바노 외에도 유명한 의사들이 많았는데 알베로티(Albergotti), 빌라노바(Villanova), 돈디(Dondi), 고든(Gordon) 등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작업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기에 교회와 충돌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교회가 강요한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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