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부르아즈 파레 : 1510 ~ 1590
앙부르아즈 파레 (또는 앙브루아즈 파레), Ambroise Pare, 1510 ~ 1590.12.20
1536년에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와 황제 카를 5세 사이에 세 번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외과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환자들 사이를 다니며 로마 교황 주치의인 비고(Vigo)의 학설에 따라 상처에 끓인 말 오줌 기름을 발랐는데 아프지만 상처에 화약의 독이 들어가 이렇게 지지지 않으면 죽는다고 여겨졌습니다. 프랑스의 젊은 외과의 파레는 처음 전장에서 말 오줌 나무 기름이 떨어져 노른자, 장미유, 테레빈유로 만든 연고를 가제에 발라 상처에 붙이면서 밤새 죽어있을 가능성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침 회진 때 확인해보니 연고로 치료한 사람들은 통증이나 염증 그리고 붓기가 없었습니다. 끓인 말 오줌 나무 기름으로 치료한 사람들은 고열과 염증, 붓기와 통증을 느껴 그 후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기로 합니다. 결론은 총상에 독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상처가 칼에 의한 시대의 외과의에게 있어 상처는 1차 치유는 곪지 않고 아물게 하는 것이었으나 14세기에서 15세기에는 화기가 사용되자 총알로 인한 부상이 처음부터 감염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파레의 발견이 성과를 얻는 데는 성과가 필요했습니다. 파레는 외과의였지만 저작자나 학자가 아녔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외과의는 수공업자였지 인문학자로서의 교양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1510년 프랑스 북서부 멘의 라발 시 근교에서 태어나 한동안은 이발소에서 일하다 파리로 가서 현재 파리 시립병원 오테르 듀(Hotel Dieu) 병원의 외과에서 일합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연대 소속 외과의로서 몬테장(Montejan) 원수를 따르기에 적당한 전문가라는 점을 인정받았습니다. 과학적인 지식은 상당했지만 라틴어를 배운 적이 없어 고대 저서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외과 수술에 뛰어났으며 좋은 관찰자이자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노파들의 처방을 확인하고 무명 외과 의사들의 비위를 맞춰 그들의 비술을 배웠습니다. 이 전투에서 그의 능력은 주목받았습니다.
1538년에 있었던 니스 강화 후 파레는 파리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임상에 전념합니다. 몇 년 뒤에 다시 두 군주국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고 파레는 프랑스군과 함께 진군하기를 희망했습니다. 상처를 처리하는 그의 새로운 방법은 널리 알려지게 되고 동료들도 능력을 인정하여 외상 외과에 대한 원리를 기록으로 남기라고 부탁했습니다. 1344년 있었던 크레스피 강화 후 파레는 다시 파리에 돌아왔고 그의 명성이 베살리우스의 선생 중 한 명인 뒤부아의 귀에까지 들어갑니다. 파레는 그와의 만남에서 총상 치료에 대해 설명했고 뒤부아는 출판을 권합니다. 이와 같은 후원에 힘입어 파레의 첫 번째 저작인 총상에 대한 지침서가 됩니다.
새로운 해부학을 자신의 것으로 삼은 것은 외과학에였습니다. 파레는 처음부터 해부학의 중요성을 알고 있어 종군일 때도 기회가 되면 해부했습니다. 그는 인체의 왼쪽을 해부하고 오른쪽을 수술에 도움이 되도록 남겨둔 채 표본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전쟁에서 1545~1550년에는 주로 해부학을 행했고 뒤부아는 파레를 해부 종사자로 임명했습니다. 뒤부아는 갈레노스의 가르침이 옳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 뒤부아가 죽을 때까지 파레는 베살리우스의 새로운 해부학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후에 외과의에게 필요한 국소 해부학서를 출판하게 됩니다. 1552년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파레에게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수족 절단에는 혈관 결찰(묶음, ligation, ligature)이 소작(지짐)보다 지혈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혈관 결찰은 잊혔던 낡은 방법이었으나 유효해서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는 왕의 주치의가 되었는데 왕의 명령에 따라 포위당한 도시로 가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파리에서 1554년에 그는 콜레주상콤(College SaintCome)의 외과의장에 임명됩니다. 군대에서 파레의 명성은 높았고 앙리 2세가 이후 프랑수아 2세, 샤를 4세도 그를 신뢰했습니다. 그는 많은 책을 저술했는데 그것은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그에게 자신의 경험을 쓰라는 권고가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수순 하게 의학과 외과학에 관한 것이었지만 전장에 나갈 때도 있어 교수회와 마찰을 빚기도 했습니다 그는 1590년 12월 20일 8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파레는 지금까지의 의사들과는 매우 달랐지만 역시 르네상스 시대 사람이었습니다. 다르다고 하지만 새로운 영역의 발견자이자 정복자로 관습에 방해받지 않고 건전한 본능을 따랐습니다. 나날의 임상에서 사용한 수술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잊혔던 것으로 그의 권위에 의해 부활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임상가였으나 자신의 주장에 이론적인 기초를 갖출 필요를 느껴 갈레노스의 의학적인 생각에서 도움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특히 '치료의 방법'은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파라셀수스나 베살리우스처럼 갈레노스를 반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파레의 연구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이론과 실제가 모순되면 이론을 모른척했다는 데 있습니다. 경험이 주도하고 '이성'과 권위'는 머리를 숙여야 하며, 만약 그것들이 경험을 확인하는 것이라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성'과 '권위'는 스콜라철학의 기초라 여겨졌습니다.
파레를 동시대인과 구별하게 해주는 것, 즉 당시의 유명한 의학자의 대부분과 비교했을 때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참으로 신중했습니다. 이 신중함은 편협함에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의술의 기본은 애정이었으며 돈 때문에 일을 해서는 안되고 희망이 없을 것처럼 보이는 예에 대해서도 끝까지 임무를 다했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외과의가 치료에 성공했다 할지라도 자랑을 해서는 안 되며 행복한 결과는 신의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의 말 중에서 자주 인용되는 '나는 붕대를 감았고 치료는 신이했습니다.'는 말은, 이 위대한 프랑스 외과의에 대한 명예의 칭호이자 그의 수많은 공헌 위에 최고의 휴머니즘적 분위기를 더해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