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 1514 ~ 1564 근대 해부학의 창시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Andreas Vesalius, 1514.12.31~1564.10.15, 근대 해부학의 창시자
르네상스의 의사들은 사체가 손에 넣기 쉬워지고 갈레노스의 해부학 개정판을 가지고 갈레노스라는 안경을 통해 보았습니다. 베네치아의 준티 서점에서는 갈레노스의 라틴어 번역서의 기념비적인 발행을 계획하여 이를 위해 인문학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파도바에서는 2년 전에 해부학과 외과학의 젊은 교수가 임명되었는데 그의 서저 중 하나가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는 6장의 전면 삽화가 있는 도해서를 1538년에 출판했고 그중 세 개의 챕터는 티치아노(Titian)의 제자로 네덜란드 출신인 칼카르(Kalkar)가 실물 표본을 보고 그린 골격도였으며 나머지 세 개의 챕터는 교수 자신이 해부한 맥관계 그림이었습니다. 이들 그림에는 상세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전까지의 어떤 책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굉장한 판매량을 기록했습니다.
의학의 다른영역에서도 이 젊은 해부학자는 이미 저자로 유명했는데 그는 라제스의 '알만수르의 책' 중 아홉 번째 책을 훌륭한 라틴어로 번역했습니다. 뒤이어 파리의 교수 안데르나흐(Andernach)의 해부서 신판을 출판해 자기 해부도집의 교과서로 삼았고 그 후에는 정맥 절개에 대한 편지로 임상에 있어 해부학의 중요성을 명백하게 증명했고, 그 속에는 기정맥(종흉정맥)에 대한 뛰어난 기재를 행했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갈레노스의 기재와 달랐습니다. 그는 비판적인 지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준티 서점이 필요로 하는 학자였고 그에게 이 작업이 맡겨졌습니다. 파도바의 젊은 교수는 벨기에 브뤼셀 출신의 베살리우스로 궁정 약제사의 아들로 1514년 12월 31일에 태어났습니다. 가족은 독일의 라인 강변 베젤에서 이주해왔기 때문에 지명을 라틴어 형용사로 하여 베살리우스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 특히 해부학에 흥미를 갖고 있어 개, 고양이, 쥐, 두더지 등을 잡아 면밀하게 해부했습니다. 벨기에 중부 루뱅에 있는 학교에 갔고 뒤이어 의학 공부를 위해 파리로 보내졌습니다. 이 학교에서 인체해부학을 배웠지만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동물 해부뿐으로, 때로는 무덤이나 처형장으로 가서 뼈를 찾아다 연구를 거듭하여 눈을 감고도 감정할 수 있게 됩니다. 파리에서도 다른 대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인체 해부가 행해졌는데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고, 성공했으며, 다음 기회에도 해부자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어 루뱅과 브뤼셀에서 공부를 하다가 새로운 과학의 땅 이탈리아 파도바로 칼커(Kalker)와 함께 합니다. 1537년 12월 5일 그는 파도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이튿날 23세의 나이에 외과학 및 해부학 교수에 임명됩니다. 이때부터 베살리우스는 쉴 새 없는 활동을 시작합니다. 해부도집은 교수에 임명된 지 몇 개월 만에 간행되었습니다. 뒤이어 갈레노스에 의한 해부학 저작을 편집하는 작업을 행합니다. 베살리우스는 이것들을 읽으며 서로 다른 판본을 비교하고 이본의 합주판을 연구하여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갈레노스의 해부에 대한 책은 원숭이나 돼지, 양을 해부한 것이였기 때문에 인체 해부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갈레노스는 인체를 해부한 적이 없었습니다. 의사는 인간의 구조를 알아야만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 베살리우스는 자신이 인간의 해부에 과한 권위 있는 책을 쓰게 된 것입니다.
칼커는 화가로서 도움을 주게 되어 1542년 8월 1일에 해부에 관한 대작 '인체의 구조에 관한 7권의 책' (De Humani Corporis Fabrica Libri Septem, 약칭 파브리카)의 원고를 완성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27세였습니다. 베살리우스는 이제 28세가 되어 생애의 정점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그는 이후로 21년을 더 살았지만 실제로 일은 끝나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로 돌아오자 동료들의 질투심 심해 동료들과 싸우게 됩니다. 다라서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신성로마의 황제이자 스페인 왕인 카를 5세 및 뒤이어 아들이자 스페인 왕인 페리페 2세의 주치의가 되어 궁정에 들어갔습니다. 제2판을 준비했는데 갈레노스 옹호자들의 비난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항변을 했지만 그의 해부실은 황제의 궁정 안에 있어 충분한 답변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1564년의 어느 날, 답답한 불안의 희생양이 되어 궁정을 떠나 이번에도 알프스를 넘어 다시 베네치아로 갔다가 파도바로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팔레스티나로 가는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성지로 가는 여행 도중에 그는 병에 걸려 소아시아 서부의 에게 해 이오니아 제도 중 한 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벨살리우스가 죽었으나 그의 '인체 구조에 관한 7권의 책'은 인체해부학에 관한, 역사에 알려진 최초의 완전한 교과서로 남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1543년은 해부학의 역사뿐만 아니라 의학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해가 되었습니다. 갈레노스의 권위는 벨살리우스에 의한 있는 그래로의 사실에 대한 설명으로, 파라셀수스의 맹습 이상으로 강한 설득력에 의해 논파되었습니다. 벨살리우스는 창조자이기도 했는데 그가 예기한 것 이상으로 해부학은 의학아 기초 그리고 그 기초 이상이었는데 유럽 의술의 '사고형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해부학적 사고가 이후의 모든 의과학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차례로 배우게 될 것입니다. 프라카스토로, 파라셀수스, 베살리우스 이 세 사람은 모두 이탈리아의 대학에서 공부했는데 세 사람 모두 당시 인문주의 문화의 산물이었습니다. 프라카스토로와 파라셀수는 파우스트 두 사람은 르네상스의 박식가였는데 그중 한 사람인 프라카스토로는 호탕했으나 파라셀수스는 파우스트와 같이 번뇌가 많은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벨살리우스는 알프스 북쪽의 추운 지방 출신으로 유럽 북부의 거친 활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5년 동안에 다른 사람의 긴 일생에 상당한 만큼의 충분한 연구를 행했습니다. 그는 광대한 의학 영역 전체가 아닌 해부학에 집중시켜 의학의 역사상 '전문화'라고 말하기는 이르지만 베살리우스를 통해 의학이 앞으로 발전해 나갈 미래의 방향을 예견해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