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야기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 1476-1553

좋은집 이야기 2021. 9. 17. 14:00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 Girolamo Fracastoro, 1476-1553

 16세기의 첫 번째 해, 파도바 대학에 콘타리니(Contarini), 나바제로(Navagero), 라무지오(Ramusio), 프라카스토로(Fracastoro)가 함께 다니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라틴화하여 코페르니쿠스(Copernicus)라 불리는 독일계 폴란드인 코페르니크(Koppernigk)도 학생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이가 많아 볼로냐에서 법률 등을 공부한 뒤, 1501년 파도바의 의학부에 입학했습니다. 파도바는 그 무렵 학문의 장소로 유명해서 세계 각지에서 학생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성 안토니우스 교회 앞에는 피렌체의 조각가 도나텔로(Donatello)가 조각한 기마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평의회의 회랑은 이제 막 만들어졌는데 이전까지 파도바에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은 없었습니다. 전반적으로 고전, 고대의 아름다움이 이곳으로 돌아왔음이 느껴졌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예술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폐허는 위대한 증인이 되었고, 곳곳에 멋진 조각상이 세워졌고 인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이 행해졌습니다. 

 피에트로 다바노는 2세기 전에 파도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조장자'는 1472년에 마누타에서 최초로 인쇄되었고 그 후에 수많은 판이 거듭되었습니다. 활자 인쇄가 그 무렵에 발명되어 수많은 책이 만들어졌고 필사본보다 가격도 저렴했습니다. 주목할 만한 책을 쓴 사람은 결과를 빠르고 광범위하게 보급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파도바에서 유명한 교사는 아킬리니(Achilini)와 폼포나치(Pomponazzi)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피에트로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였으며, 아킬리니는 아비센나와 마찬가지로 '제2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렸습니다. 아킬리니는 아라비아 학문의 신봉자였으며 특히 철학자인 아베로에스(Averroes)를 높이 평가했으나 아킬리니는 피에트로와는 달리 해부학자였습니다. 그는 인체를 해부했으며 뛰어난 관찰자였습니다. 피에트로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는 14세기에 의사들은 이미 인체에 대한 자세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전의 해부학 교과서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은 인체를 해부했습니다. 폼포나치도 피에트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폼포나치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는 주석자인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드로스(Alexander)에 의한 것으로 피에트로는 이 저작의 책을 번역했으나 폼포나치는 독창적인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연법칙의 연구가 필수임을 주장하고 세계는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연속되는 상황에 대한 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리과학의 연구자였기 때문에 교회 및 우세한 종교적 견해에 그는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으로 인한 광신이 새로이 강요되는 이전에는 이교도로 존재하는 것이 다시 가능해졌습니다. 교회에 의한 종교적인 억압이 느슨해져 있었습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파도바 대학에서는 고전철학을 가르치고 있었고, 고대 의사들에 대한 해설이 행해졌으나 아라비아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라비아 번역자와 주석자를 경유해야만 알 수 있었던 그리스의 의사들이 그리스어 원전으로 돌아왔습니다.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은 터키에 의해 점령당했고 다수의 그리스인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리스어 지식은 이제 더 이상 극히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와 서유럽 각국의 학자들은 그리스어 의학 교과서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 직접 번역된 라틴어판이 인쇄되었고 그리스어판도 개정되어 인쇄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거나 충분하게는 알려지지 않았거나 충분하게는 알려지지 못했던 저자들 켈수스, 아레타이오스, 루퍼스 , 아이기나의 파울루스 등이 빛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전집'도 인쇄되었습니다. 아직 고대가 우세했는데 고대를 재현시키는 것이 아직은 주요한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요구는 더 이상 체계화된 고대가 아니었으며, 몸을 구속하기 위한 재킷이 입혀져 있는 고대가 아니었습니다. 전체로서의 고전주의가 되살아났습니다. 이러한 재발견은 인간 동지와 우주 전체에 대한 인간 동지와 우주 전체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깊은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대서양에서 개인이 눈을 떠 활동 및 자기표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휴머니즘은 르네상스의 도덕적인 이상이 되었는데, 이는 인간성이 최고로 가능한 발전이자 개성의 가장 높은 경지의 전개였습니다. 상상력에 의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가장 번영했던 날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은 이들 국가가 어땠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스스로 훈련했습니다. 이 시기의 이들 젊은이가 몇 년 뒤 콘타리니는 추기경이 되었고 1541년에는 레겐스부르크의 의회에서 신교도와 가톨릭 사이의 조정에 노력했습니다. 나바제로는 고전문학의 권위자가 되어 키케로, 퀸틸리아누스, 테렌티우스,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의 뛰어난 판본을 베네치아의 서점을 위해서 편집했습니다. 

 프라카스토로는 땅딸막하고 어깨가 넓으며 검은 머리가 풍성하며 코는 약한 위로 솟아 있었습니다. 그는 베로나 근처에 멋진 병장이 있어 전원생활을 즐겼습니다. 거기에는 그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프라카스토로에게는 글 솜씨가 있어서 기지에 넘치는 편지를 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내기도 하고 잘 정리된 라틴어로 시와 과학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시 예술, 영혼, 교감과 반감에 대해서 썼고, 천문학에 대한 전문서를 썼으며 지리학 교과서를 집필했습니다. 특히 프라카스토로는 두 권의 의학서를 저술했는데 이로 인해서 불멸의 이름을 얻었으며 의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는 역병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14세기 무렵 흑사병이 유행하여 구세계를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전염병은 프라카스토로가 특히 주목하고 있었는데 15세기 말에는 같은 종류의 새로운 질병이 발견되었으며 광범위하게 퍼져나가 신분의 상하에 관계없이 이 병을 앓았습니다. '사랑의 역병'은 시필리스(매독)으로 불리게 되었고 프라카스토로 시대부터 이 이름을 사용해 왔습니다. 

 1546년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책 '전염에 대하여'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감염증이 확산되지 못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프라카스토로는 교황 바오로 3세가 그를 트리엔트 종교회의의 주치의로 임명했지만 그는 오래 머물지 않았고 바로 베로나 근처에 있는 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70세 때 이 별장에서 만찬 도중에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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