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야기

콘스탄티누스 아프리카누스 : 1010~1087, 위대한 의사

좋은집 이야기 2021. 9. 15. 14:00

콘스탄티누스 아프리카누스 Constantine of Africa, 1010~1087, 위대한 의사

출처: 픽사베이

  켈트족과 튜튼족이 몇 개의 파도가 되어 남쪽과 서쪽으로 향해 이동하여 피로에 지친 로마제국을 석권했으며 정복한 상대의 문명과 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새로운 전개의 특징을 부여한 것은 기독교였습니다. 환자들뿐만 아니라 건강한 노인들에게도 기쁨의 물결이 밀려들었습니다. 원시시대에서부터 고전시대에 이르기까지 늘 따라다니던 죄와 열등함에서 질병은 자유로워졌습니다. 수난은 신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며, 신성한 변용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환자는 특전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의무가 되었습니다. 얼마지 않아 큰 규모의 황자를 돌보는 일이 조직화되고, 커다란 병원이 만들어졌습니다. 베네딕토 수도회의 창설자인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Benedict)는 병자들의 간호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수도사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처음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고전시대 과학에 적의를 품었지만 점차 과학과 이교도의 의학과도 화해를 하게 됩니다. 의학지식을 가진 기독교는 무지한 사람보다는 병자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동고트의 왕 테오도리크(Theodoric)의 고관이자 후에 수도사가 된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는 고전 문헌의 연구가 기독교도에게 가치가 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가 고령에 이르기까지 살았던 수도원의 도서실에는 다른 종류의 책 이외에도 의학서가 놓여 있었습니다.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원은 점차로 카시오도루의 근본 방침을 채용하여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원이 만들어지면서 의학 공부와 임상을 위한 센터를 만들었고, 보존되어 있는 고대의 의학 지식이 여기서 연구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센터 중에서도 보비오(Bobbio), 장크트갈렌(St. Gall), 라이헤나우(Reichenau), 풀다(Fulda)는 특히 기록해둘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중세 초기에 의사들은 상급 성직자에게 속해 있었는데 일반 의사가 있긴 했지만 극소수였습니다. 사제와 수도사는 주로 의학문헌 보존을 하면서 임상학자이기도 해서 이 새대를 '수도원의 의학'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슬람권은 그리스 대의학자의 저작을 아라비아어로 번역하여 내용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았지만, 라틴어를 사용하는 유럽에서는 잊힌 책이 되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소라누스와 그 외 그리스 의사들의 저작 중 어떤 것은 라틴어로 번역되었지만 너무 복잡하여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의사들의 짧은 전문서, 초록, 압축판은 필수적인 것을 임상에 바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그에 비해서는 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결론적으로 중세 초기의 의학 문헌은 주로 처방집, 식양생에 관한 짧은 힌트 및 맥박, 열, 소변, 사혈에 대한 짧은 논문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때로 편지로 암시되었으며, 어떤 때에는 교리문답 형식을 취했고, 또 어떤 때에는 기억하기 쉽도록 광시형태를 취했습니다. 이 시대의 의학 문헌에서 독창적인 생각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기존의 의학 교의는 신중하게 보존되었습니다. 이것들이 맹목적으로 필사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도원 의학의 저자들은 저자들은 틀림없이 편집을 하기는 했지만 내용을 이해하고 행했으며 민간 의료에 대한 그들의 지식을 적어 넣었습니다. 교회의 커다란 공헌은 병자의 간호를 행한 것뿐만 아니라, 암흑시대에 의학의 불씨를 계속 빛나게 해서 때가 왔을 때 새로운 불이 일도록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 후반이 되어 아프리카의 콘스탄티누스라고 불리는 사람이 출현하기까지 때는 오지 않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위대한 의사입니다. 그는 1010년 카르타고에서 태어났습니다.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의학과 다른 과학을 배우기 위해 바빌로니아로 갔다가 궁정 생활을 하게 되는데 생활이 맞지 않아 은퇴하고 모테카시노로 가서 데시데리우스(Desiderius) 대수도원장의 환영을 받았으며 수도가 되었습니다. 수도원의 평화로움 속에서 아라비아어로 된 의학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에 헌신하다가 1087년 사망합니다. 동료 수도사들은 그를 '동양과 서양의 사장', 새로운 히포크라테스라고 불렀습니다. 이야기는 전설이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이슬람 세계와 밀접하게 접촉했으며 동양의 과학을 공부하여 서구에 전달했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그가 당시의 서구 과학에 통달해 있었고, 훌륭한 라틴어를 사용했습니다. 콘스탄티누가 갖는 의의는 이 중개자로서의 역할에 있습니다. 그는 마법의 열쇠를 사용하듯 하여 동양 세계를 서양에 열어놓았습니다. 의학서 분야는 불모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수도원의 의학서 저작들은 같은 저작을 5세기에 걸쳐 다루었습니다. 이들 저서는 한동한 임상에 도움을 주었지만 점차 쇠퇴해갔습니다. 의학은 교회에서 점점 멀어져 더 이상 성직자들의 독점물이 아니었습니다. 교육을 받은 일반인도 등장하게 됩니다. 독립적이고 생산적인 일이 가능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지적인 사람은 보다 나은 교육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번역한 것은 유대인 이삭(Isaac)이나 알라 이븐 엘압바스(Alaibnel Abbas)등과 같이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10세기 저자들의 저작이었습니다. 당시의 임상학자들 역시 아라비아를 거쳐서 고대 그리스 의사들의 저작, 히포크라테스의 '잠언집', '예후', '식양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전집의 갈레노스에 의한 주석, 그의 치료에 대한 대저작 및 조그만 책인 '의학'이 돌아온 것으로 이슬람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갈레노스는 유럽 세계의 의술을 정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의 번역은 살레르노 의학교에서 교과서가 되었으며 번역되었기 때문에 급속도록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가정의에 지나지 않았던 의사들이 학자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이슬람권 준데샤푸르가 그랬던 것처럼 살레르노는 '히포크라테스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유럽에서의 첫 번째 의학부가 탄생했습니다. 12세기에 의학교는 대량의 문헌을 낳았습니다. 이들 저작의 각 행에서 콘스탄티누스의 영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유럽으로 가져온 새로운 지식이 자세학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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