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센나 Avicenna, 980~1037 : 이슬람 천재 의사
아비센나, 이븐시나, Ibn Sina, Avicenna 980년 8월 ~ 1037년 6월 22일, 이슬람 천재 의사

아비센나는 페르시아 사람으로 라제스가 세상을 떠난 지 약 45년 뒤에 태어났습니다. 아비센나의 생애는 경향과 템포가 아주 달랐습니다. 그의 본명은 아부알리 후사인 이븐 압둘라 이븐 시나(Abu Ali Husainnibn Abdullahibn Sina)였으며 고관의 아들로 보하라 근처, 즉 이슬람 제국의 주변에서 약 980년에 우즈베키스탄 아프샤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신동으로 열 살에 코란을 암기하고 고전을 즐겨 읽었으며 지식은 거의 기적적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철학, 법학 그리고 유클리드 기하학을 공부했습니다. 16세 때 의학공부를 시작했는데 그에게 있어서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환자를 직접 진료함으로 해서 책에서 읽은 내용에 더해 책에 없는 지식을 대량으로 습득했습니다. 그는 끊임없는 지식을 갈망했습니다. 그는 '집에서 밤에 램프를 밝혀놓은 채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일할 힘이 떨어지면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해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고 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잠이 들어도 공부에 열중했기 때문에 일어났을 때에는 잠들어 있는 이에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문제가 종종 해결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변증법, 물리학, 종교를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고부를 계속했고, 신학과 형이상학에 몰두했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18세가 되기 전에 그는 의사로서 유명해졌고 왕자를 진찰하여 왕자가 건강해졌기에 서재의 보고를 이 젊은 의사에게 개방합니다. 몇 년 뒤 21세였을 때 아비센나는 스무 권으로 이루어진 백과사전을 저술합니다. 이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생게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는 차례로 다른 통치자 밑에서 일했지만, 혼란스러운 시대였기 때문에 후원자를 고르는 것이 언제나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란 중서부의 도시인 하마단에 이르렀을 때 이슬람 국가의 왕 아미르인 샴 우드 다우라(Shamud Eaula)가 심한 급경련통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아비센나가 치료합니다. 아미르는 그가 여러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재상에 임명했으나 하마단에는 군벌이 있었는데 새로운 재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병사들이 그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체포하고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으나 아미르는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지만 추방하기로 합니다. 그때 마침 왕족 후원자의 급경련통이 재발했는데 아비센나가 다시 치료했고 이번에도 재상에 임명됩니다.
아비센나의 활동은 쉴 새 없이 계속되는데 낮에는 국무, 밤에는 연구, 강의 그리고 저술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운치를 모르는 남자는 아니였습니다. 세상 물정에 익숙한 사람으로 와인, 여자, 노래를 즐겼으며 아마도 건강이 허락하는 것 이상으로 열중했습니다. 그 후 경력에는 기복이 심해 어떤 시기에는 왕후와 같은 생활을 또 다른 시기에는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란 제2의 도시 이스파한에 정착하여 과학에 전념했습니다. 금요일에 많은 학자들이 그의 뛰어난 지혜를 배우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체력이 소진하여 58세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는 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대부분은 극히 종합적인 것으로 과학의 여러 분야에 걸쳐 있습니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훌륭한 연구를 행하여 동시에 누구보다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은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였으며 후세로부터 제2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여겨졌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의학서는 '의학의 규범'이라고 불리는 전문서로 의학이론, 단순한 약, 병리학 각론과 치료 그리고 처방집의 5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각의 권은 다시 부로 나누어져 있고 각각의 부는 다시 장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아비센나가 취한 방법은 아리스토텔레스 변증법에 따른 것이었으며 그의 저작은 아라비아 스콜라철학의 산물이었습니다.
라제스가 아비센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보다 더 커다란 차이를 생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라제스는 음악가로 상상력이 강한 사람이었으며, 아비센나는 순수하게 논리적인 사색가였습니다. 라제스는 임상 학자였으며 아비센나는 아라비아 의학의 체계를 확립한 사람이었습니다. 라제스는 병력, 개개인의 병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비센나도 날카로운 관찰자로 개개의 환자를 연구했지만, 흥미를 갖고 있던 것은 각 유형의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에서의 그의 스승이었던 것처럼, 갈레노스는 그의 의학에서의 스승이었습니다. 아비센나는 갈레노스와 마찬가지로 튼튼한 체계를 구축하기에 노력했습니다. 아비센나의 손에 의해 의학은 그리스와 아라비아의 지혜를 포함하는 거대하고 통일되며 독립적이고 논리적인 체계가 되었습니다. 그의 의술을 수학과 비슷한 학문으로 만들겠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와 같은 '체계'는 자연에 대한 폭력이기는 하지만 매력적인 것으로 배우기가 쉬웠고 응용하기가 쉬었습니다. 마음속의 의문을 버리고 받아들인 사람은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체계가 광범위한 영향을 주어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것처럼 규범적인 것이 된 것은 당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럽에 이 책이 알려지게 된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이 체계는 지배적이었으며, 이슬람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지배적입니다.
의사들은 위대한 아라비아인 목사의 학설에 의해 훈련이 되었습니다. 특히 아라비아 의학은 스페인에서 계속 발전했습니다. 이곳은 아라비아의 일부였지만 생활은 독립되어 있었습니다. 8세기에 우마이아 왕조가 아바스 왕조로 바뀔 때 우마이아 왕조 사람이었던 압드 에르 라흐만(Abder Rahman)은 아프리카 북서부 마우레타니아로 도망쳤는데, 스페인의 아라비아 사람들의 부름을 받고 군주가 되었습니다. 세력을 얻은 그는 코르도바의 에미르가 되었으며 2세기 후에 후계자는 칼리프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과학과 예술은 궁정에서 번창했습니다. 머지않아 세비야와 그라나다에 아라비아의 나라가 만들어졌으며, 작은 나라이기는 했지만 학자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었습니다. 스페인의 대부분에서 이슬람교의 지배는 1492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것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입니다. 이슬람교가 지배를 하는 동안 아베로에스, 마이모니데스, 아벤조아르 등과 같이 우수한 철학자이자 의사인 사람들이 활약했습니다. 스페인에는 아불 카심과 같은 유명한 외과의와 이븐 엘 바이탈과 같은 약리학자가 있었습니다. 톨레도는 서쪽의 칼리프국의 주요한 대학으로 여기서 동서의 문화가 만나 서로를 윤택하게 해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