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에르 비샤 : 병리 조직학의 창시자
사비에르 비샤(그사비에 비샤, 자비에 비샤) : 병리 조직학의 창시자, Xavier Bichat, 1771.11.14 ~ 1802.07.22
파리에서 오래된 의학부는 관습적인 권리를 지속적으로 갖고 진보는 스쳐 지나갔습니다. 레이덴, 빈, 괴팅겐은 의학교육의 센터로 번영을 누렸습니다. 대학병원의 임상은 의학교육의 주요한 기둥으로 해부학, 생리학, 화학은 커다란 진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병리 해부학이 태어났으나 파리의 의학부는 낡은 학문이 있는 의사들이 고대의 교과서에 대해 논했고 먼 과거에 속하는 의사들을 늘려가며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1778년 의학부는 늦은 감이 있지만, 임상 교수 자리를 만들어달라는 서류를 제출했습니다. 프랑스에도 유능한 의사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다른 조직해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1776년 의학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라손(Lassonne)과 빅 다지르(Vic d'Azyr)가 왕립 의학협회를 창립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의 모든 의사를 의학의 진보를 위해 보으는 것으로 시골 의사라도 언제나 협회에 질문과 제안을 하여 자신의 관찰을 협회에 전달할 수 있었고 미래 의학교육 재편성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외과의는 1731년부터 비슷한 조직인 왕립 외과학 아카데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가장 뛰어난 영향력을 가진 멤버는 앙투안 루이(Antoine Louis)였습니다. 1789년 5월 5일, 베르샤유 삼부회가 열리고, 같은 해 7월 14일 바스티유가 습격을 받았으며, 8월 27일 인권선언이 있었습니다. 대혁명은 과격해져 왕이 도망치려 했으나 체포되고 정부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튀르리 궁전은 습격을 당합니다. 1792년 8월 8일 포고로 의학부는 해산되고 프랑스는 공화국이 되었으며 루이 16세는 단두대 처형을 당합니다. 1793년 8월 8일 국가가 원조하는 모든 조직이 폐지되어 외과학 아카데미, 의학협회, 지방 의학부, 외과의 학교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로 지도도 관리도 없어지고 누구라도 개업할 수 있는 등 프랑스 의학교육과 의학 임상이 혼란에 빠집니다. 프랑스가 유럽의 거의 절반과 전쟁을 하여 600명의 의사와 외과의가 쓰러지면서 적합한 자격을 가진 의사가 군대에서 특히 부족했는데 군의 의사 부족은 젊은 학생들로 보충됩니다. 국민공회는 기초부터 재건하기 위한 사람으로 푸르크르아(Fourcroy)를 임명합니다. 그는 의사이자 화학자로 1794년 11월 27일 공회에 안을 세워 제출하고 전반적으로 인정되어 바로 실현됩니다. 의사의 공급으로 3개의 건강학교가 파리, 몽펠리에, 스트라스부르에 세워집니다. 처음부터 의학과 외과학이 구별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겠다고 생각하여 의학과 외과학이 통일이 프랑스에서 단번에 수행됩니다. 3개의 병원 즉, 내과질환, 외과 질환 그리고 희귀 질환 및 특수한 합병증을 위한 병원이 지어집니다. 공화국은 각 지역이 추천한 학생 한 명은 '조국을 위한 학생;으로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대에 뒤떨어져 있던 프랑스는 단번에 변화된 교육 및 연구시설을 보유하게 됩니다. 단순 체제의 변화가 아닌 의사들의 모든 정신상태가 변화된 것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을 보고, 새로운 경향을 보게 됩니다. 파리의 학교는 60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여 몇 년 뒤에는 1,500명이 되었습니다. 의학교육의 새로운 가능성이 나라 전체에 젊고 능력 있는 학생들을 끌어들여 프랑스는 임상의학이 다른 나라보다 앞서 가게 되고 의학의 진보를 하게 됩니다.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프랑스 드소(Desault)는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외과의이며 국소해부학의 창시자 중 한명으로 혁명 전에도 수많은 학생들에 의해 평가가 높았습니다. 건강학교가 창설되었을 때 그는 외과 임상의 장이 됩니다. 드소의 임상에서 실습생들은 그날의 임상교육이 시작되기 전 전날의 임상강의를 보고하게 되어 있었는데 보고하기로 한 실습생이 오지 않아 다른 학생이 대신했는데 준비도 없이 훌륭한 보고를 합니다. 이 학생이 바로 비샤였으며 드소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비샤는 시골 의사의 아들로 몽펠리에와 리옹에서 공부했으며 군대에 소집되었습니다. 1793년부터 파리에 살았습니다. 비샤는 겸손하고 내성적이며 능력이 있어 드소는 그를 '외과학 잡지'의 편집자로 삼았고 그의 진보를 촉진시켰지만 드소는 1795년 세상을 떠납니다. 비샤는 1796년에 '의학경집협회'를 설립하고 젊은 의사들과 모여 일반 의학 문제를 토론합니다. 그가 선택한 분야는 해부학과 생리학 그리고 병리학 총론이었습니다. 1800년에 그는 파리 시립병원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해부학과 생리학 교수가 되길 원했지만, 다른 후보가 선택되어 개인적인 강의와 교시를 행했는데 많은 학생들이 참여합니다. 그는 실험, 해부, 병리해부를 아침부터 밤까지 행했으며 1년에 600구의 해부를 실행했다고 합니다. 1802년 7월 결핵을 앓고 있던 비샤는 기절을 했고 혼수상태에 빠져 일어나지 못하고 사망하는데 그의 나이가 30세였습니다.
그는 세상을 일찍 떠났지만 여러 책을 세상에 남깁니다. 그 중 1800년 '각종 막에 대해서'와 '생과 사의 연구' 그리고 1801년 '일반 해부학' 등이 있습니다. 비샤의 방향은 할러에서 출발하여 몽펠리에 학파에 의해서 생기론으로 인도받았습니다. 할러와 마찬가지로 생명은 독자적인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생리학적 과정은 무리적인 것과 기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생명현상은 생물에 내재되어 있는 성질인 '생명 특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관찰은 가능하지만 설명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비샤의 생기론은 실험실에서 결과에 에 인도받은 것으로 그의 연구는 실험 결과에 따랐기 때문에 유물론적인 생리학자들조차 존경했다고 합니다.
비샤는 병리학을 해부학적으로 보는 방법을 장기에서 조직으로 한 단계 전진시켰습니다. 수십 년 뒤에 동물세포가 발견되었고, 더욱 진보하여 피르호(Virchow)의 세포 병리학이 탄생했습니다. 비샤는 18세기 초 할러와 모르가니가 구축한 기초위에 섰고 그의 연구는 19세기의 프로그램을 구체화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생리학의 개념에 의한 병적 현상의 해석 및 그 현상을 해부학적 기초와 관련지어 의학이 나갈 길을 제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