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드 폰 할러 : 알프스의 시인, 현대 생리학의 아버지
알브레히드 폰 할러 : 시인, 과학자(해부학자, 생리학자) Albrecht von Haller, 1708.10.16~1777.12.12
알프스의 시인으로 할러는 독일 문학에서 탁월한 지위를 점합니다. 할러의 '스위스 시의 시험'은 익명으로 1732년 출판되었는데 자연에 대한 강한 감정을 가진 서정시인의 작품이었습니다. 강한 열정이 있었지만, 당대 다른 시인들이 보여준 과장은 없었습니다.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나 알프스 산맥 곁에서 자랐기에 산속을 돌아다니며 장엄함에 깊이 감동하여 알프스 산맥에 대해서 노래하고 알프스의 주민들에 대해 적었으며 그들의 단순한 삶은 도시인에게 주는 경고라고 선언했습니다. 신을 자연 속에서 발견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신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고, 자연은 외치고 있으며, 전 세계는 신의 존재를 내보고 있습니다. 그는 신이 창조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알프스 산맥 같은 자연에서의 대규모 창조물뿐만 아니라 그가 철저하게 조사한 인간의 심장뿐만이 아녔습니다. 그는 식물학자였기 때문에 식물의 수술과 같은 자연의 소규모 창조물을 발견했습니다. 해부학자이자 생리학자였기에, 근수축도 보았습니다. 자연을 시인의 눈으로 보는 동시에 현미경을 통해 자세히 관찰하여 똑같은 윤리 감각으로 양자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젊었을 때 할러는 시인이었지만, 전 생애를 통해서는 과학자였습니다. 동시대의 사람들은 할러를 지혜에 관한 모든 영역에 흥미를 가진 만능 학자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는 게스너(Conrad Gesner)나 쇼이처(Scheuchzer)처럼 옛 정의에 의한 마지막 자연지 연구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생물계, 무생물계의 전 영역을 포함하여 관찰하는 연구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과학에서 얻은 것을 농업, 목축, 의학, 기술 등 실용적인 면에 이용하려 했던 학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할러는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허약한 체질로 평생에 걸쳐 병마에 시달렸습니다. 처음부터 독자적인 길을 선택하여 지식욕구를 만족시키고 사전이나 문법서를 편집하고, 2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전기를 쓰는 등의 열정을 보였습니다. 학교에서도 학교 친구보다 근면하고 유능하다고 인정받지 못하면 매우 불만스러워했을 정도입니다.
친척은 그가 신학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여 신학 공부를 하라고 했지만, 그는 의사가 되겠다고 희망하여 15세가 되었을 때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주도 튀빙겐에 있는 튀빙겐 대학(University of Tübingen, Eberhard Karls Universität Tübingen) 학생이 되지만 깊이 있는 공부를 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당시 유능한 해부학자인 듀베르네(Duverney)가 가르치고 있기는 했지만 해부를 위한 인체를 얻을 수 없었기에 학생들은 죽은 개로 공부합니다. 식물채집 여행이 있었지만, 학생들은 자료를 얻지 못하고 대부분 술에 취해서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자유분방한 친구들과의 학창 시절의 시간, 16개월 동안의 그곳에 생활은 할러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1972년 봄에 튀빙겐에서 레이덴으로 옮겼습니다. 해부실에는 인체가 있었고, 식물원이 있었고, 임상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준알비누스와 부르하버가 있었습니다. 최고의 열정으로 의학 훈련을 받고, 해부학으로 학위 논문을 써서 1972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의학 연구를 위해 런던과 파리를 가게 됩니다. 병원과 박물관을 찾아가서 수술과 병리해부에 출석합니다. 해부학에 대한 흥미가 커져 파리에서 해부학자 윈슬로(Winslow)에게서 장기를 주위에서 떼어내지 않고 그대로 연구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좀 더 공부하기 위해 바젤 대학(University of Basel)으로 가게 되어 요한 장 베르누이(Johann Bernoulli) 밑에서 열심히 수학을 배우게 됩니다. 바젤에 머무는 동안 식물학에도 전념했는데 그전까지는 의학의 보조로 생각했지만, 이후 식물을 철저학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채집 여행을 거듭해서 고른 시료를 가지고 돌아와 분류하고 기재합니다. 해부학 연구를 했던 바젤에서의 몇 학기 뒤인 1972년 봄에 할러는 베른으로 돌아와 의사로서 자리를 잡습니다. 스위스 수도의 좁은 환경이었지만, 끊임없이 노력하여 매년 알프스 산맥으로 여행을 가서 매번 대량의 시료를 가지고 돌아왔고, 병원으로부터 병리해부를 해도 좋다는 허가를 얻는 데 성공합니다. 부르하버의 '의학 지침'으로 돌아가 이 중요한 저작에 상세한 주석을 달게 됩니다.
정체가 된다는 생각에 낙담할 무렵 1736년 봄, 28세의 젊은 개원의였던 할러는 괴팅겐 대학의 해부학, 외과학, 식물학 교수로 초빙됩니다. 그를 본질적인 가치로 평가를 했던 것입니다. 할러는 괴팅겐 대학(University of Göttingen)의 발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곳에서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게 됩니다. 괴팅겐은 독일의 레이덴 대학이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도서관은 얼마 되지 않아 세계적으로 유명해집니다. 연구에 성과를 거두기 위한 데이터를 공표하고 뉴스를 교환하기 위한 수단으로 1739년 '괴팅겐 학술 신문'이 창립되었고 할러는 25년 동안 편집하며 논문, 비평과 그 외의 글들 12,000편을 투고합니다. 1751년 '왕립 과학회'가 창설되어 회장이 되었습니다. 식물학과 해부학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은 혈관 해부학의 도해집과 아름다운 동판화였습니다. 1747년에 알비누스는 뼈와 근육의 그림을 포함한 2 절판을 간행했습니다. 이것이 해부학 도판의 역사적 이정표가 됩니다. 그러나 할러는 '살아 있는 해부학', 즉 생리학으로 향하게 됩니다. 할러는 피자극성과 감각성은 동물 생명의 기본 현상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피자극성에 대한 견해는 다음 생각에 커다란 영향을 줍니다. 이렇게 할러는 생물학 학설을 장기간에 걸쳐 풍요롭게 하고 임상의학에서도 그의 학설은 특히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흐름에서 많은 결실을 맺습니다. 에든버러 의학부는 레이덴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1747년 '생리학 초보'가 출판됩니다. 이것은 생리학 교과서 중 최초였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하여 두 번째 저서 '인체 생리학 원론'을 저술합니다. 이것은 8권으로 이루어진 두꺼운 책으로 1757년부터 1766년에 걸쳐 발행됩니다. 이 책은 생리학의 모든 영역을 자세히 다룰 뿐만 아니라 해부학과 발생학, 이론 의학도 다루어집니다. 1753년 할러는 그 위치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그것은 과로로 인한 건강하지 못한 몸, 동료들과의 언쟁, 자녀 장래, 외국 생활에서의 고향에 대한 향수가 동기였을 것입니다. 다시 고향에 돌아왔을 때 무명의 의사에서 세계적 명성의 과학자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그의 작업은 계속되어 방대한 '인체 생리학 원론'을 집필하고, 또한 확장판도 출간합니다.
소문에 의하면 어느 날 해적이 영국 배를 습격했는데 그중 할러의 책이 든 상자가 있었습니다. 그 상자에 적힌 것을 본 해적 선장은 다음 항구로 가서 전송해 주었다고 합니다. 해적 조차 유명한 학자 할러를 존중해 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