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부르하버 : 당대 전 유럽 스승의 표상
헤르만 부르하버 : 당대 전 유럽 스승의 표상 (Hermann Boerhaave, 1668.12.31~1738.09.23)
18세기 초의 모든 젊은 의사와 의학생들에게 흡인력이 대단한 부르하버는 네덜란드 의사이자, 화학자로 그의 이름으로 된 부르하버 증후군(Boerhaave syndrome)이 있습니다. 부르하버가 있었던 레이덴 대학은 그로 인해 의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레이덴(Leiden, 네덜란드 서부 조이트홀란트주의 도시)에 가면 그의 발자취를 볼 수 있는데 무덤은 성 피터 교회에 있고, 옛 병원 근처에는 기념비가 있습니다. 레이덴에서 의학회가 열리면 이 기념비는 방문자들로 인해 꽃으로 둘러 싸입니다. 의학부가 있는 건물은 부르하버 지구라고 불리고 있을 만큼 그에 대한 존경의 의미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부르하버의 저서는 1709년 '의학 지침'(Institutiones Medicae)과 1709년 '진단 진료 잠언'(Aphorismi de Cognoscendis Et Curandis Morbis)으로 두권뿐입니다. 이외 식물 및 화학 논문, 임상 병력, 대학에서의 강연이 있습니다. 동시대의 장황하고 애매한 책에 비하면 책 또한 간결, 명료하여 판을 거듭하고,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 혁명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발견도 하지 않고 의학에 어떤 새로운 생각을 부여하지 않았는데 그는 절충 주의자였기 때문에 어느 학파에도 소속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부르하버에게 힘을 부여한 것인데 창시자가 누가 됐든 좋은 것을 채용했습니다. 그는 의학에서의 해부학과 생리학의 중요성을 믿었고, 물리학이 의학에 중요한 공헌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의기계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비우스의 영향이 남아 있는 레이덴에서 그가 화학의 가치를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의사들 사이에서는 시드넘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현대의학은 이들을 요소로 만들어졌으나 이들 요소를 종합하려는 시도는 인공적인 체계 형성하는데 지나지 않아서 부르하버는 경계를 가진 체계의 작성을 포기하고 모든 병적 현상을 설명하려고는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환자와 치료 즉 임상에 비해서 이론에 흥미를 갖지 않은 것입니다. 부르하버의 성공 비결은 의사 및 임상 교사로서의 개성이었습니다. 친밀하게 접촉한 사람, 침대 곁에서 그를 보고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누구나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상적인 의사의 모습으로 제자들도 다정하게 도움을 주려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할러는 '학식은 그렇게 많이 않을지도 모르는 동등한 학식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참으로 신과 같은 성질, 모든 사람들에 대한 친절한 마음, 질투심 많은 사람들이나 경쟁상대에 대한 자비심에서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은 없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말을 그가 하는 것을 들은 사람은 아무 없었다'라고 했습니다.
부르하버는 가난한 시골 목사의 아들로 성직에 종사할 생각으로 레이덴 대학에서 신학부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수학, 화학, 식물학, 의학에 흥미를 갖고 의학부로 옮길 결심을 하여 하르데르웨이크 대학으로 옮겨 의학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이후 레이덴으로 돌아와 의사로서 자리를 잡았는데 처음에는 환자가 적어 수학을 배울 시간이 충분했습니다. 1701년 그는 이론 의학 강사가 되었고, 2년 뒤에는 흐로닝언 대학(Rijksuniversiteit Groningen)에서 초빙되었으나 레이덴에서 월급을 올려주고 다음의 자리를 약속하게 됩니다. 1709년 호튼(Hotton)이 세상을 떠나고 부르하버는 식물학 교수와 식물원장이 됩니다. 식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1709년 열심히 일을 해서 다음 해인 1710년 역대급 식물 리스트를 발간하게 됩니다. 레이덴의 식물원은 부르하버의 리스틀 가지고 있으면 번호에 따라 명찰을 보고 모든 식물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르하버는 겨울에는 화학 강의를 했습니다. 우수한 능력을 가졌지만, 독창적인 연구를 하지는 않았으며 보일(Bolye)의 뒤를 따랐습니다.
부르하버의 독보적인 분야는 임상교육 영역이었는데 비들루(Bidloo)가 세상을 떠난 이후인 1714년부터였습니다. 환자의 침대 옆에서 진정한 의사로 타고난 진단자로 날카로운 통찰을 가지고 환자를 접했으며, 의약이나 올바른 조언뿐만 아니라 환자에게 친밀감을 주었고, 강의나 임상 교시에서도 엄격한 논리를 듣는 사람들과 공유했습니다. 프루우벤(Vrouwen) 교회 뒤편에 있는 병원에는 두 개의 방에 여섯 개씩 침대를 임상교육을 위한 남녀 병동이었습니다. 유럽 의사들의 절반은 이 열두 개의 침대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부르하버는 침대를 옮겨 다니며 학생들에게 설명했습니다. 그의 저서 '의학 지침'과 '진단 진료 잠언'은 각각 두 제자인 슈비덴(Swieten)과 할러(Albrecht von Haller)가 주석을 달아 편집했는데 주석은 주로 부르하버 본인의 관찰을 두 사람이 기록한 것입니다. 슈비덴은 의료 개혁자이고 유능한 속기사이기도 하여 그의 노트가 부르하버의 임상 교육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새로운 임상교육 방법의 요람은 레이덴이고 부르하버의 병원이었습니다. 환자를 진찰하는 건전한 방법이 이곳에서 가장 먼저 행해졌는데 우선 임상력을 완전하게 기록하고 뒤이어 환자 증상을 확인합니다. 검사는 아직 해부학적이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장기는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살폈고 그런 다음 진단과 예후가 결정되었고 치료과정을 생각했습니다. 부르하버 시대의 학생들은 해부학자인 바이스(Weiss)로부터도 배울 수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알비누스(Albinus)라고 라틴어화했습니다. 부르하버는 점점 더 바빠지게 됩니다. 할러의 일기에는 '부르하버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어 모든 곳의 학생이 그에게 배우기를 희망했고, 고귀한 사람들 중에서 그의 진찰을 희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헤이그의 대사인 페넬롱(Fenelon)씨도 강당에서 나오는 그를 만나려고 했습니다. 우리 학생이 약 120명이었는데 그중 절반이 외국에서 왔습니다. 1725년 그는 관절의 심한 염증으로 고생했으면 거의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그의 통풍이 심하고 그 통증도 잦아 업무를 줄일 수밖에 없어 1729년 화학과 식물학 교수를 사임했으나 임상은 1738년까지 계속했습니다.
유명한 부르하버의 명언으로 최고의 건강비결을 적어 놓은 책을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Keep you feet warm
Your head cold
Your stomach empty
You will never need a doctor
해석하면 "발은 따뜻하게 머리는 차갑게, 배를 비우면 그대는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입니다.